민족의 맥을 잇는 사람들 저자명:박두순 출판사명:지경사 목차 책머리에 1 1. 대나무로 엮은 예술 3 2. 매듭에 삶을 엮으며 12 3. 조상의 벼루 솜씨를 되살리다 21 4. 은장도에 조상의 얼을 30 5. 불그림의 1인자 39 6. 내 고향 특산물, 돌그릇이 최고 48 7. 칠백 년 하회탈의 맥을 잇는다 56 8. 우리 옛 떡맛을 지킨다 66 9. 붓 한 자루에 온 정성을 모아 75 10. 다시 태어나도 길쌈꾼이 되겠어요 84 11. 옹기장이 할아버지 93 12. 갓 할머니 103 13. 손가락 끝의 눈으로 엮는 대바구니 112 14. 담뱃대에 조상의 입김을 122 15. 이어지는 징소리 130 16. 목기 만들기를 자랑으로 삼아 141 17. 나전 칠기의 예술인 150 18. 연아 올라라, 하늘 높이 올라라 159 19. 국악기에 우리 가락의 멋을 168 20. 밤낮 명주를 짰지요 176 21. 기와집 지붕만 보면 즐겁지요 184 22. 장롱 무늬쇠붙이는 내 손이 가야 193 23. 잊혀진 쪽물 들이기를 되살려 202 24. 평생을 종이와 더불어 211 25. 13대째 잇는 활 만들기 가업 220 26. 부채와 함께 살아 온 세월 229 @ff 책머리에 한길 걸은 보람, 외길 걸은 즐거움 이 땅에 살다 간 우리 조상들은 무척이나 슬기롭고 지혜로웠다. 아름다운 문화를 가꾸고 그 터전 위에서 삶의 꽃을 피우며 살았다. 그것은 고려자기나 측우기, 금속 활자 들의 몇 가지 작픔만 꼽아 봐도 금방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은 자랑스러우며 우리 민족의 솜씨는 뽐낼 만하다. 이 책에는 자랑스런 한민족의 솜씨를 오늘에 이어 가는 분들의 이야기가 엮어져 있다. 조상의 숨결과 체취가 담긴 활, 부채, 탈, 돌그릇 등을 빚는 작지만 귀한 손들의 이야기이다. 오늘을 살아가며, 사라져 가는 조상들의 생활 문화 유산을 고집스럽게 지켜 가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눈물겹다. 한평생 또는 수십 년, 몇 대째를 외롭고, 괴롭게 그리고 끈질기게 오로지 한 길을 걸어온 장인들의 발자취는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우리에게 고귀한 인간 문화재로 남아, 우리 것이 얼마나 값지고 좋은 것인가를 일깨워 준다. 이들은 우리 문화의 뜨거운 핏줄을 이어 가는, 우리 민족의 얼을 가꿔 가는 사람들이다. 바로 우리 민족의 맥을 잇는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 얼을 간직하고 가꾸는 일은 매우 소중하다.어린이들에게는 더 더욱 그러하다. 어린이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참된 삶, 보람된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 가슴속에 그 씨앗을 뿌려 가꾸기를 바란다. 또한 한 길을 걷는 보람과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다면, 이 글을 엮은이로서 더없이 즐거운 일이겠다. 엮은이 박두순 @ff 1. 대나무로 엮는 예술 미국 워싱턴 기념관 안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을 비롯한 외국 관광객들이 치는 박수였다. "오! 원더풀(Wonderful), 원더풀!" 외국인들은 박수와 함께 한결같이 훌륭하다고 외쳤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 사람이었다. 우리 나라 죽세공의 중심지인 전라남도 담양군의 서한규(61살) 할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 1985년, 우리 나라 죽세 공예 분야의 제1인자로 꼽히는 서 할아버지가 한국 공예 기술 시범을 보여 주기 위해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 기념관에서 그 솜씨는 선보였던 것이다. 서 할아버지의 대나무 쪼개는 솜씨에 외국인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나무를 두께 1mm로 가늘게 기계와 같이 쉬지 않고 쪼개는 것이었다. "원더풀, 원더풀!" 또 박수와 함께 함성이 터졌다. 이번에는 실처럼 뜬 대나무로 조그만 상자를 엮어보였다. 손놀림이 기계처럼 정확하고 재빨랐다. 외국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박수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서 할아버지가 기술을 선보이고 인사를 하자, 외국인들은 앞으로 몰려와 사인을해달라고 너도나도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서 할아버지는 40년 동안 대나무와 씨름해 온 보람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은 물론 죽세 공예를 해 온 보람을 이처럼 크게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서 할아버지는 이보다 앞서 1982년에는 제7회 전승 공예대전에서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색깔을 곱게 넣은 조그만 대나무 상자(채상)를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서 할아버지는 고향인 담양의 죽세공 맥을 잇고, 세계에 이를 자랑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 뒤, 서 할아버지는 더욱 쉬지 않고 채상을 만들어 마침내 87년 1월에는 인간 문화재 53호로 지정받아 채상장으로서의 최고 명예를 얻었다. 그러기까지 45년 동안 오로지 한 길에만 매달려 대나무와 길고 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죽세공의 고장 담양에서 태어난 소년 서한규는 담양 동국민학교를 졸업한 뒤에 광주 상업 학교(지금의 광주 상고 전신)에 합격했다. "아버지, 합격했어요." "그래, 잘 했구나. 그런데 학교에 가긴 어럽겠다." "예?" 서 소년은 너무 뜻밖이어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아버지의 허락으로 입학 시험을 쳤는데, 합격을 하고 나니 학교를 갈 수 없다고 해서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부채 만드는 일 하나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학비를 대 줄 수 있겠느냐?" 서 소년은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다. 밥도 먹기 싫고 일도 하기 귀찮아 누워 있기만 했다. 어머니는 그런 서 소년이 안쓰러워 곁에서 마음을 달래주며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불렀다. "너도 죽세 기술이나 배우거라.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다른 일거리를 찾아본 다음에 배우겠어요." 서 소년은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담양에서 알아 주는 합죽선(부채) 기술자였지만, 서 소년은 그것이 무척 힘들어 보여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른 일거리를 찾아봐야 별것 없을 거다. 죽세가 제일 낫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죽세 기술을 가르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 "생각할 게 뭐 있느냐? 내일부터 죽세 배우기로 하자." "예" 서 소년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이튿날부터 서 소년은 아버지 곁에서 죽세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재미없을 것 같던 일이 그렇지 않았다. 서소년은 무척 흥미가 있었다. 아버지가 한 가지를 가르쳐 주면 금방금방 익혔다. 아버지는 아들의 솜씨를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다. "한규야, 너 죽세 솜씨가 썩 좋구나. 나보다 더 잘 하는 어른에게 배우는 게 어떻겠니?" "예,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어요." 서 소년은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가 칭찬해 주는 것이 그처럼 기쁠 수가 없었다. "네가 알지 모르지만 담양에서는 이소회 어른이 기술이 좋으니 그 분에게 배워야겠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서 소년은 이 할아버지로부터 더 좋은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5년을 배우고 났을 ㄸ 6.25가 터졌다. 서 소년은 이제 청년이 되어 군대에 들어갔다. 53년에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서 청년은 고향의 '문화 공예사'라는 죽세공 생산 회사에 들어갔다. 담양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배운 서 청년의 실력은 금세 드러났다. 공장장도 하루에 8개밖에 못 짜는 대바구니를 서 청년은 15개씩 짜 내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입사한 지 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서한규 씨, 사장님이 찾습니다." 공장장이 전해 주었다.서 청년은 부리나케 사장실로 달려갔다. "당신 얘기를 들었소. 솜씨가 좋으니 공장일은 그만두고 기술을 가르쳐 주시오." 그 길로 서 청년은 기능공들에게 죽세 기술을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바구니에 손잡이를 달고 뚜껑을 만드는 등 아이디어도 개발했다. 그 때부터 집에 기능공 10명을 두고 바구니를 만들었다. 얼마 뒤에 회사도 그만두었다. 주문이 너무 밀려 물건을 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 개발과 함께 비닐, 플라스틱 제품이 쏟아져 나와 대나무 제품은 인기를 잃어 갔다. 대나무 제품은 만들어지기만 할 뿐 팔리지 않았다. 따라서 생활하기가 어려워졌다. 함께 일하뎐 마을 사람들도 대나무 엮기에서 손을 뗐다. 서 아저씨도 하는 수 없이 바구니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서 아저씨는 대바구니를 잊을 수 없었다. 모양을 좀 다르게 만들면 팔릴 것 같았다. 조상들의 얼이 밴 대나무 제품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안방에서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왔다는 채상을 보게 되었다. "옳지, 이거구나!" 서 아저씨는 무릎을 탁 쳤다. 채상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바구니 만드는 일을 그만둔 지 5달 만에 서 아저씨는 채상 만들기에 매달렸다. 직접 대밭에 찾아가 높이 6m, 둘레가 12cm 이상 되는 대나무를 구해 왔다. 톱으로 일정하게 잘라 실처럼 가늘게 대나무를 쪼개어 붉은빛, 푸른빛, 노란빛 은빛 등으로 물감을 들인 뒤에 채상을 엮었다. 엮은 채상에다 무늬도 넣었다. 3가지밖에 없던 무늬도 십자 무늬, 만자 무늬 등 37종류로 개발했다. 마침내 서 아저씨의 채상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3개가 한 벌인 채상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열흘 정도로 한 달에 3~4개밖에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주문을 받아 채상을 만든다. 결혼 예물인 반지나 보석, 시계 등을 넣어 두는 고급 상자인 채상은 값도 비싸 한 벌에 30~40만 원을 받는다.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양각 1리의 조그만 작업실에서는 오늘도 인간 문화재인 서 할아버지의 손놀림에 따라 빨강, 파랑, 노랑 등으로 물든 대나무가 이리저리 얽혀 들면서 우리 조상의 솜씨가 깃든 예술품인 채상으로 태어난다. 서 할아버지는 요즘 둘째와 넷째 딸이 아버지의 솜씨를 잇겠다며 채상을 열심히 만들고 있어 더없이 기쁘다. @ff 2. 매듭에 삶을 엮으며 "당신이 큰 사람 되어서 기쁘군요." 최은순 할머니가 막 방에 들어와 앉는 할아버지에게 말은 건넸다. 큰 사람이란 최 할머니의 남편인 정연수 할아버지가 인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 할아버지는 인간 문회재 증서를 받고 이제 바로 돌아 온 길이었다. "다 임자가 거들어 준 덕이지." 정 할아버지는 고마움을 최 할머니에게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이 넘도록 함께 매듭을 엮어 왔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정 할아버지는 아내가 정말 고마웠다. 자기가 하는 매듭 일을 불평 한 마디 없이 도와 왔기 때문이다. 부모를 모시고 매듭만으로 생활을 꾸려 가야 하는 정 할아버지로서는 함께 매듭일을 해 주는 아내가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매듭이란 큰 돈벌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은 매듭도 많이 팔릴 때여서 생활하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일제 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의 전통 매듭을 하지 못하도록 은근히 막아 매듭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럴 때 아내가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최 할머니는 1915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5살에 서울로 와 21살에 정할아버지와 결혼했다. "여보, 나도 매듭을 배워야겠어요." 최 할머니가 남편 정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힘든 일인데 당신이 할 수 있겠소?" 정 할아버지는 아내에게 매듭일을 시키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매듭 일이 한자리에 앉아서 차근차근해야 되는 것이므로 꼼꼼한 성격인 자신에게 알맞다고 생각했다. "재미있어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 주겠소." 최 할머니는 남편으로부터 매듭을 배우기 시작했다. 집 안은 온통 매듭과 실더미였다. 재미도 있고 싫증도 나지 않았다. 손에 물집이 생기고 굳은살이 박혔다. 그렇게 실을 꼬고 엮기를 3년, 마침내 매듭을 완전히 익혔다. 남편이 거들어 주지 않아도 매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매듭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만드는 일 뿐 아니라 파는 일에도 나섰다. 생활은 겨우 꾸려 갈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들 하나, 딸 셋을 낳아 교육도 시켰다. "여보, 이제 해방이 되어 살기 좋아 질 거예요." 최 할머니는 매듭 일도 잘 되고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수입도 좋아질 것이라는 뜻으로 남편에게 말했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오죽이나 좋겠소." 정 할아버지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서양 문물이 밀어닥쳐 매듭은 오히려 힘을 잃어 갔다. 서양 문물에 밀려 빛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생활을 점점 더 어려워졌다. 많은 매듭장이들이 직업을 바꾸었다. 두 부부는 온갖 괴로움을 겼으면서도 끝까지 매듭 일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가 의지해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거리라곤 장례식 때 상여에 쓰기 위해 주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골 등 지방의 장례식에는 상여에 매다는 매듭 장식인 부전을 쓰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부전을 사러 오는 지방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들을 위해 부부는 한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부전을 만들었다. 두 부부는 꺾이지 않는 노럭이 마침내 열매를 맺어 68년, 이들 집안에 보람이 찾아들었다. 정 할아버지가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배운 사람인데, 어찌 내 덕이겠어요." 최 할머니는 오늘처럼 남편이 높아 보인 적이 없었다. "옆에서 매듭 동무가 되어 준 것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겠소." 정 할아버지는 아내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두 부부의 정다운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것은 매듭이라는 끈으로 서로 묶여 있는 까닭에서였으리라. 좋은 일을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매듭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가자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매듭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부부는 오랜만에 보람을 느꼈다.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최 할머니에겐 또다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 왔다. 어느 날, 함께 매듭을 엮고 있던 남편이 옆으로 비스듬히 넘어가더니 방바닥에 눕는 게 아닌가. "여보, 졸리면 한숨 주무세요." 최 할머니는 남편이 졸려서 눕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아니, 여보. 바로 누워요." 그리고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눈까지 감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여보, 여보..." 다급히 흔들었으나 눈을 뜨지 않았다. 최 할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편은 병원으로 옮겨져서야 정신을 되찾았다. "여보, 날 알아보겠어요?" "응" 남편은 아들, 며느리, 손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정 할아버지는 겨우 일어날 수 있었으나 제대로 걷거나 움직이지는 못했다. 최 할머니는 고혈압으로 앓는 남편을 온갖 정성을 다해서 간호했다. 그러나 74년, 남편은 지극히 간호한 보람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함께 매듭의 한 길을 걸어온 매듭장이로서의 남편을 잃은 최 할머니는 세상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온 세상이 텅 빈 듯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고 해도 그 때처럼 괴로운 적은 없었다. '이제는 혼자서 매듭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답답했다.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남편이 가족에게 남긴 것은 평생을 살아 온 조그마한 집과 매듭 기술뿐이었다. 최 할머니도 웬지 손이 떨리고, 눈도 흐려져 매듭을 하기가 전과 달랐다. 누구에겐가 매듭 기술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참에 맏딸(정봉섭 씨, 55살)이 부업삼아 매듭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잘 생각했다. 집에서 그냥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이런 기술을 배우는 게 얼마나 좋으냐. 돌아가신 너의 아버지도 흐뭇해하실 거다." "어머니,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최 할머니는 딸과 같이 매듭을 엮게 되어 힘이 부쩍 났다. 심심한 것도 사라졌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최 할머니가 그 대를 이어 76년에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참 기뻐하시겠네요." 딸이 어머니를 축하 겸 위로해 주었다. "그렇다마다, 네가 매듭 솜씨를 닦고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최 할머니는 비록 남편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매듭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 가슴 속에 살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매듭을 엮으며 살던 집은 이사할 때도 팔지 않고 그냥 두었다. 가업인 매듭이 이어지고 빛난 곳이어서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기념하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 최 할머니의 뜻이다. 올해 75살이 된 최 할머니는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딸이 인간 문화재 지정을 받는 것이다. 최 할머니는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오늘도 딸과 함께 매듭을 엮는다. @ff 3. 조상의 며루 솜씨를 되살리다 "누가 또 이 벼루를 깨뜨렸느냐?" 아버지의 큰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곧 두 동강 난 벼루를 든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누가 이 벼루를 깼느냐?" 아버지가 마루에 올라서며 또 한 번 크게 소리쳤다. 진한 소년은 안방 문 뒤에 서서 떨고만 있었다. 아무 대답이 없자 아버지는 진한 소년을 찾았다. "진한이 어디 갔느냐? 안방에 있지? 이리 나와 봐라." "예"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한 진한 소년은 살그머니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진작 나오지 않고 있었느냐?" "..." "너, 이 벼루 깼지?" "..." "왜 대답이 없어?" "예" "이놈, 진작 대답하지 않고..." 진한 소년은 몸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어쩌다가 그랬니?" "칼로 용무늬를 새기다가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진한 소년은 이제 아버지로부터 더 큰 불호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시는 게 아닌가. 진한 소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 놀란 것은, "너, 벼루 만드는 것 배울래?" 하고 아버지가 물으시는 게 아닌가! 진한 소년은 전에도 몇 번 아버지의 벼루 만드는 작업실에 몰래 들어가 돌로 벼루를 깎아 만들다 망가뜨리기도 하고, 조각칼을 못 쓰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아버지에게 혼이 났었다. 그러면서 벼루 만드는 법을 익혀 왔다. 8살 때부터 진한 소년은 벼루를 만들고 싶어 아버지를 졸라으나, "넌 힘드는 일을 안 해도 된다. 나만 하면 됐지, 너에게까지 시키고 싶지 않아 공부 열심히 해서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시며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 큰 꾸중을 내리지 않고 웃으시는 것이다. "아버지, 정말이에요?" 진한 소년이 믿어지지 않아 되물었다. "그럼, 정말이지." 진한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이 벌써 4년째나 자신의 작업실에 들어가 벼루를 만들며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다못해 이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자기의 벼루 만드는 기술을 아들에게 물려주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벼루 만들기에 소질이 있어 그러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버지, 오늘부터 가르쳐 주세요." 진한 소년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서두르지 마라. 내일부터 가르쳐 주마." "예, 아버지. 열심히 배우겠어요." 그 때 진한 소년의 나이가 12살.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일이었다. 이튿날부터 진한 소년은 작업실에서 아버지를 따라 벼루를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돌 자르기부터 배웠다. 벼루 크기에 맞춰 돌을 자르는 일이었다. 재미있고 신났다. 그리고 깎아 내기와 뚜껑에 무늬 새기기 등을 익혔다. 힘은 들었지만 벼루가 한 개씩 만들어질 때마다 그 즐거움은 이루 만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진한 소년에게 보령의 벼루에 대해서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우리 충청남도 보령은 벼루 고장으로 유명하지. 우리 나라에서 나는 벼룻돌 가운데 보령에서 나는 오석이나 청석을 으뜸으로 치지. 이 청석을 깎아 만든 '남포(보령군의 옛 이름)벼루'는 조선 시대부터 이름을 떨쳤지. 우리 나라 서예가들은 물론 중국 땅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글씨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어한단다." "남포 벼루는 어째서 유명해요?" "응, 돌이 단단해서 먹물을 잘 빨아들이지도 않고, 또 잘 증발하지도 않아서 벼루에 입김만 불어 먹을 갈아도 편지 한 장을 충분히 쓸 수 있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질이 우수하기 때문이란다." 진한 소년이 청년이 되면서 벼루 만드는 기술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이제부터는 너 혼자서 만들어라. 마음대로 자유롭게 만들되, 신들린 듯 정신을 한군데로 모아야 한다." 라며 아버지는 마음가짐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기술로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혼이 깃들여야 좋은 벼루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총청남도 보령군 청라면에서 벼루를 만드는 공장인 '진한 공예사'를 운영하는 김진한(50살)씨는 내 고장 전통 공예품의 맥을 잇기 위해 지난 38년 동안 자신의 어두컴컴한 작업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이고장 명산품인 '남포 벼루'를 만드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아 왔다. 김 아저씨는 지금도 아버지의 말을 밑거름으로 삼아 몇달이 걸리더라도 마음에 드는 벼루를 만든다.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깨 버릴 정도로 고집스런 장인이다. 김 아저씨는 벼루 만들기를 3대째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검고 단단한 돌덩이는 38년 동안 벼루를 만들어 온 김 아저씨의 손만 거치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거나,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모양이 조각된 아름다운 벼루로 변한다. 그래서 지난 87년에는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로 지정받는 등 벼루 만들기에서 인정을 받았다. 또 지난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기념품 생산 업체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87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성체 대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우리 나라 지도 모양의 벼루를 선물해, 우리 전통 문화의 훌륭함을 널리 알렸다. 보령군 안의 10여 개 벼루 만드는 공장에서는 기계로 벼루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김 아저씨는 굳이 조각칼만으로 일일이 깎아서 만드는 수공 벼루 제작을 고집한다. "그것이 조상의 솜씨를 그대로 잇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계로 깎은 것은 이미 조상의 숨결이 걷혀 버린 작품이라고 봐야지요." 김 아저씨도 한때는 벼루 만들기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다. 값싸고 편리한 필기구 등에 밀려 붓이 점점 사라지면서 벼루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아저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업이 자신대에서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벼루 만들기를 40여년 동안 지켜 왔다. "다행히 요즘 들어 서예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벼루 수요도 불어나고 있습니다." 김 아저씨는 요즘 6명의 제자이자 종업원들과 함께 벼루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다. 김 아저씨는 주로 벼루 뚜껑에 용의 모습을 새겼으나, 요즈음엔 매화, 국화 등 사군자와 십장생, 산수 등 갖가지 무늬를 아름답게 새긴다. 벼루 모양도 원형이나 사각형이 아닌 본래 돌이 가지고 있는 모양 그대로를 살려 거기에 맞는 무늬를 새겨 넣는 새로운 방법으로 개발하고 있다. 그것은 조상의 솜씨를 새롭게 발전시킨다는 뜻이라고 김 아저씨는 말한다. 김 아저씨가 만든 벼루는 일일이 조각칼로 깎은 것이어서 좀 비싼 편인데, 학생용으로(가로 7cm, 세로 10cm)은 1만~1만 5천 원 정도다. 김 아저씨의 꿈은 두 가지이다. 조각에 흥미를 갖고 있듯 아들 성수(20살)군에게 벼루 만들기를 대물림하는 것이 첫 번째 꿈이다. 두 번째 꿈은 앞으로 벼루 전시관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교육장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 아저씨는 이미 집 앞에 아담한 한옥 한 채를 지어 놓았다. 여기에다 우리 나라에서 벼루가 쓰이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낙랑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벼루 300여 점을 재료와 모양을 그대로 되살려 전시할 마음을 먹고 있다. @ff 4. 은장도에 조상의 얼을 "너, 정말 칼을 만들 수 있겠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가 앞에 앉은 소년을 바라보면서 걱정스럽게 물어 본다. "예, 만들 수 있어요. 이 손과 팔을 보십시오." 소년은 두 손을 쫙 펴고 통통한 팔을 걷어 보인다. "허허, 그놈 참." 할아버지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소년을 바라본다. 무척 기특하다는 표정이다. "그렇다면 내 가르쳐 주지. 배우다가 어럽다고 도망가면 안 된다?" "예, 할아버지. 염려 마십시오." 소년의 나이는 14살이고 이름은 박용기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허리에 차고 다니는 은장도가 하도 멋있게 보여 이웃 마을 칠성리에서 은장도를 만들고 있는 장익성 할아버지를 찾아와 은장도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 허락을 받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의 일이다. 장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 제자는 지금도 전라남도 광양군 광양읍 구산리에서 은장도를 만들고 있다. "먼저 풀무질부터 배우거라. 화덕에 숯을 넣고 이 풀무로 숯불을 피워라." 박 소년은 열심히 풀무질을 해 숯불을 벌겋게 피웠다. 거기에다 장 할아버지는 은장도를 만들 쇠를 벌겋게 달구는 것이었다. 한참 풀무질을 하고 나니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장 할아버지는 달구어진 쇠를 망치로 두들겨 칼날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름에 달구었다. 그러기를 20여 차례나 거듭했다. 박 소년은 며칠이고 풀무질만 했다. 무척 힘들었지만 말없이 일했다. 어느 날 장 할아버지는, "이제 됐다. 그만하면 불피우기는 된 듯하다. 지금부터 나처럼 칼날을 만들어 보아라." 하고 실제로 칼날을 만들어 보였다. 칼날 만들기는 더 힘들었다.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살이 찢어지기도 했다. 몇 달이 걸려 칼날 만들기를 익히자 은이나 백동을 사용해 장식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다음에 국화나 태극 등의 무늬를 놓는 법도 배웠다. "이젠 칼자루와 칼집을 만들어 보자." 장 할아버지는 먹감나무, 대추나무, 매나무, 회양목 등의 나무와 상아, 쇠뿔 등을 깎아 칼자루와 칼집을 맞춰 끼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은장도의 길이는 15~17cm 정도이고 칼날은 10cm 정도이다. 박 소년이 은장도를 만든 지 1년이 되었다. 아침부터 방까지 15시간을 은장도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한 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스승인 장 할아버지는 한 개 반 혹은 두 개를 만드는 솜씨였다. 박 소년은 은장도의 내력이나 쓰임에 대해서도 틈틈이 스승에게 물어서 공부했다. "은장도는 언제부터 만들어 전해 내려왔습니까?" "글쎄, 그것에 관한 것이 어디에 적혀 있는지 모르겠다만 몸을 보호하는 호신용으로 고려 시대부터 차고 다닌 것으로 안다. 세종 임금도 우리 고장인 광양에서 만든 은장도를 차고 다니셨다고 하더라." "그러면 은장도는 무엇 때문에 차고 다녔습니까?" "허, 그놈. 궁금한 것도 많구나. 주로 여자들과 선비들이 차고 다녔는데 선비들이 난리나 어려움을 당하면 욕되게 살지 않으려고 은장도로 목숨을 끊곤 했지. 그걸로 자신의 충성스런 마음을 보인 거야. 귀양살이하는 선비들도 은장도를 몸에 지니고 다녔단다." "여자들은 왜 은장도를 가지고 다녔습니까?" "여자들은 옷섶에 노리개와 같이 지니고 다녔지. 뜻하지 않은 위기를 당했을 때, 몸을 보호하란 것이었어. 딸이 시집갈 때 어머니가 옷섶에 넣어 주었지." "저는 멋을 부리기 위해 은장도를 차고 다니는 줄로 알았어요. 알고 보니 굉장한 것이네요." "그렇다마다." 박 소년은 1년이 지나 스승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이만큼 배웠으면 혼자서 만들어도 되겠다. 독립을 하거라. 만들 때는 부디 온 정성을 쏟아야 한다." "예, 스승님 곁을 떠나게 되어서 무척 허전하고 섭섭합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보답하기 위해 좋은 칼을 만들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열심히 정성껏 만들면 그것은 꼭 이루어진다." 박 소년은 은장도 장인이 되어 혼자서 은장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집에다 작업장을 만들었다. 집안 어른들이 상놈들이나 하는 짓은 한다고 구박이 심했다. 그러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은장도를 만들었다. "세종 임금이 지녔던 자랑스런 광양의 은장도를 빛내리라. 우리 고장의 얼을 내 손으로 이어 가리라." 은장도를 만드는 데는 스물세 번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은장도가 잘 만들어지지 않언 때는 음식을 먹지 않고 기도만 했다. 은장도 만들기는 돈벌이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은장도를 찾는 사람이 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아, 자네도 그만두고 다른 일이나 하게." 옛 스승에게서 은장도 만드는 법을 배운 제자들이 하나 둘 은장도 만들기를 그만두었다. '나도 그만둘까 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마음을 돌이켰다. '돈벌이가 안 된다고 굳이 은장도 만들기를 그만둘 필요까지는 없다. 농사를 지어 가면서라도 은장도는 만들어야 한다. 스승에게 한 약속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박 청년은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꾸준히 은장도를 만들었다. 1년에 20여 개 정도를 만들어 팔아 생활에 보탰다. 별 쓸모도 없는 은장도를 만든다고 이웃으로부터 손가락질도 받았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솜씨는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40여 년을 한결같이 은장도를 만들어 온 보람이 있어 지난 78년 2월에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은 것이다. "귀하는 조상의 얼이 담긴 은장도를 만드는 데 40여 년 동안 오직 한 길을 걸어와 그 맥을 잇게 했으므로..." 인간 문화재 지정 인정서를 받는 박 아저씨의 손이 떨렸다. 그동안 얼마나 참기 어려운 일을 견디어 내며 은장도를 만들어 왔던가! 그래도 이처럼 그 노력을 인정받게 되니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이젠 할아버지가 된 은장도 장인 박용기 씨는 자기 집 사랑채에 작은 작업장을 만들어 놓고 자신이 은장도를 배울때처럼 정성들여 젊은이들에게 은장도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박 할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은장도 날에다 한마음이라는 뜻의 '일편심'이라는 글자와 '용'자를 새겨 놓는다. "취미삼아 배운 것이 이제는 나의 천직(마땅히 해야 할 직분)이 되어 버렸어요.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무척 어렸지만 보람된 일입니다." 박 할아버지는 돈에 신경을 쓰지 않고 은장도를 만든다. 오직 잘 만들겠다는 마음뿐이다. 은장도는 옛 선비와 여자들의 충성과 정절을 지켜 주는 구실을 했지만, 요즈음은 관광 기념품으로 팔린다. 용인 민속촌이나 외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관광 호텔 토산품 판매장에서 은장도는 선물용으로 팔려 나간다. 그것도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조상의 훌륭한 솜씨를 널리 알리고 또 우리가 이어받아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뜻깊은 일이다. @ff 5. 불그림의 1인자 이동연(79살)할아버지는 60년을 넘게 오직 인두로만 그림을 그려 온 낙화의 제1인자다. 불국사나 해인사 등 이름난 절이나 관광지의 기념품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낙화다. 불에 달군 인두로 나무를 지져 그린 그림이 낙화다. 그러니까 불그림인 셈이다. 이 할아버지는 눈이 침침하고 손이 떨려도 불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처음엔 배운 것도 없고 해서 밥벌이나 할까 하고 그렸는데 차츰 그 멋에 취해 이젠 손에 인두를 들지 않으면 허전해요." 이 할아버지는 요즘 불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밥맛이 없을 정도란다. 전국의 이름난 관광지에서 관광 공예품으로 낙화를 그려주는 이들은 40여 명 되지만, 인간 문화재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그 단 한 사람의 인간 문화재가 바로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에 사는 이동연 할아버지이다. 이 할아버지는 벌써 20여 년 전인 1969년 11월에 중요 무형 문회재인 인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간 문화재 이름은 낙죽장이다. 낙화란 이름은 요즘에 생긴 것으로 국어 사전에도 나오지만, 옛날에는 낙죽으로 불렀다. 인두로 지져서 그리는 화판이 주로 대나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요즘은 대나무만이 아니라 향나무, 피나무, 미루나무 등이 화판으로 쓰인다. 그래서 낙화라 하기도 한다. 이 할아버지가 낙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7살 때부터이다. "아버지, 저도 서당에 다니게 해 주세요." 7살이 된 이 소년은 글 공부를 하고 싶어 아버지를 졸랐다. "우리 형편에 어떻게 학비를 낼 수 잇느냐. 그냥 집에서 나하고 일이나 배우자." 그 당시 이 소년의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그러나 7살의 소년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아버지, 저도 글을 배우고 싶어요. 서당에 보내 주세요." "안 된대도. 밥도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에 서당엘 어떻게 다니겠느냐." 아버지는 꿈쩍도 안 했다. 이 소년은 더 졸랐다가는 아버지의 꾸지람이 내릴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17살이 되도록 서당이나 학교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를 따라 이웃 마을에 놀러 갔다가 인두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화롯불에 달군 인두를 대나무 판에 갖다 대니 국화나 매화 같은 그림이 나오는 게 아닌가! 이 청년은 그것을 본 순간, '나도 저런 그림이야 그릴 수 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한번 배워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온 이 청년은 아버지에게, "저 건너 마을 김양언 할아버지가 인두로 그림을 그리는데 저도 배우고 싶어요." 라고 인두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말했다. "보기엔 쉽다만 해 보면 쉽지 않을 거다. 또 그냥 가르쳐 주겠니?" 아버지는 학비라도 내야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 배워도 되는 거지요? 그러면 제가 얘기해 학비는 내지 않고 배울 수 있도록 할께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배워 봐라."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이 청년은 단숨에 김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저도 이 낙죽 그림을 그려 보고 싶어요!" "그래? 너희 집 어른이 배워도 좋다고 하더냐?" "예" "그럼 내가 가르쳐 주마." "할아버지, 학비는 드릴 수가 없는데요..." "예끼, 학비는 무슨 학비." 거저 배우라는 것이었다. 이 청년은 뛸 듯이 기뻤다. 그날로 김 할아버지의 제자가 되었다. 김 할아버지는 근세 낙죽으로 이름 높은 김원형 선생의 아들이었다. 이튿날부터 이 청년은 김 할아버지에게서 피죽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속을 가로로 획을 세로로 고르게 낙을 놓는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낙은 인두로 대나무를 지지는 것이다. 쉬운 낙질을 배운 이 청년은 무늬 놓는 방법을 배웠다. 국화, 매화, 구름, 산수, 탑, 물고기 등 갖가지 무늬를 놓는 법을 빼놓지 않고 익혔다. 이 청년은 1945년 김양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 할아버지 밑에서 낙화를 배웠다. 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 청년은 이미 낙화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낙화로 살아가기에는 어려웠다. 그 때는 그림이 잘 안 팔렸기 때문이다. 이 할아버지는 이제 조상의 솜씨를 잇는다는 마음 하나로 불그림에 온 힘을 쏟았다. 우리 조사의 불그림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윷가락 등에 불로 지진 그림이 있었고, 할머니들이 쓰던 참빗에도 낙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이런 간단한 불그림을 뛰어넘어 예술적인 불그림을 그린다. 이 할아버지의 산수화는 볼 만하다. 기이한 모양의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이름 높은 산과 강이 나무 판자 위에 펼쳐지는가 하면 눈발을 이고 있는 대나무 숲 그림도 빼어나다. 이처럼 나무 찬 위에 그려진 불그림은 종이나 천보다 더 오래갈 수 있고 보관하기도 쉽다. 낙화에 쓰이는 도구는 인두와 화로뿐이다. 인두의 크기는 바느질에 쓰이는 것과 비슷하나, 그 끝이 앵무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고 몸체가 몽땅하다. 인두는 두 개를 화로에 달구어 번갈아 사용한다. 인두의 열이 어무 뜨러우면 나무가 타고, 식으면 그림이 희미해지기 때문에 그 온도를 맞추는 데도 오랜 수련이 필요하다. 이 할아버지는 인두를 볼 언저리에 대어 보고 그 느낌으로 온도를 알아낸다. 이 할아버지는 어릴 때 낙화를 밤 늦게 배우면서 졸다가 인두에 빰을 덴 적도 있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고 해야지. 혼이 나간 사람이 그린 그림이 무슨 가치가 있나! 이것도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그려서는 안 돼." 이렇게 스승인 김 할아버지의 꾸중을 들은 뒤로는 졸지 않았다고 한다. 인두가 얼마나 달았는지도 모르고 스승인 김 할아버지가 그리다가 둔 그림을 지지다가 버린 적도 있다고 이 할아버지는 털어놓는다. 그만큼 인두의 온도 측정과 낙질은 매우 중요하다. 낙질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속살락과 변락으로 나누어 합죽선(부채)속살이나 참빗, 긴 담뱃대 등에는 살짝 지지는 속살락을 하고, 연속 무늬를 놓아갈 때는 변락을 친다. 이 할아버지의 불그림에는 밝음, 어두움, 또 멀고 가까움까지 나타나 있다. 이것은 오랜 세월을 낙화로 살아 온 결과이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의 매화 그림은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꼬리를 쳐든 다람쥐며, 늙은 소나무 가지 위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는 학의 모습이 마치 먹을 듬뿍 찍어 한 번에 그린 한국 전통의 묵화처럼 멋이 있다. 그런가 하면 웃음 넘치는 풍속화처럼 예스런 표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눈을 부릅뜬 달마 대사도 거기에 들어 있다. 그림 그리는 도구가 붓이 아니고 달군 인두일 뿐 이 할아버지의 그림에는 생명력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한 가지 남아 있다고 한다. 그것은 훌륭한 제자를 두고 낙화를 가르치는 일이다. @ff 6. 내 고향 특산물, 돌그릇이 최고 "병옥아, 웬만하면 그만두고 화서 집안일을 도와 다오. 도저히 혼자 힘으로 할 수가 없구나. 사표를 내기가 어럽겠지만, 잘 생각해 보아라." 최병옥 선생님은 아버지의 편지를 다 읽고 마음이 괴로웠다. 아버지는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집에 와서 곱돌그릇 만드는 일을 거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전에도 아버지는 몇 번인가 곱돌그릇 만드는 일을 함께 하자고 만한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최 선생님은 아버지 말씀을 물리치기가 어려워 웃어넘기곤 했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아버지의 청이 워낙 간곡해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며칠을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 온 가업을 잇느냐 아니면 끊어지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어 결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아버지도 당신이 하던 일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곱돌그릇 만들기를 아버지도 자신의 대에서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곱돌그릇 제작 기술이 아버지 대에서 사라진다면 최 선생님 자신의 고향인 장수 특산물의 맥도 끊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곱돌은 쑥빛으로, 전세계적으로 나는 곳이 드물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라북도 장수와 평안북도 정주 두 곳에서만 난다. 세계적으로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 북극에 가까운 지방에서 적은 양이 생산되고, 그밖에는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 선생님의 고향인 전북 장수에서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곱돌이 생산되어, 오래 전부터 이 곱돌을 깎고 갈아 그릇을 만들어 써 왔다. 이 곳 장수 곱돌그릇의 유래는 약 300년 전인 조선 숙종 임금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누군가 우연히 곱돌로 재떨이를 만들어 썼다고 한다. 그 뒤에 식기로 만들어져 궁으로 들여보내지면서 장수의 특산물이 된 것으로 전해 온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가업뿐만 아니라 고향 특산물 제작 기술을 끊어뜨릴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최 선생님은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최 선생님은 공과 대학을 나와서 고등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최 선생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곱돌그릇 만드는 기술을 물려받아 '장수 석기'라는 조그만 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 선생님은 고민 끝에 가업을 잇기로 결심하고 학교에 사표를 냈다. 교장, 교감뿐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이 깜짝 놀랐다. 갑작스런 일이라 그럴 만도 했다. 최 선생님을 배웅하는 선생님들은 돌이나 깎으로 고향으로 가겠다는 것이냐는 눈빛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최 선생님은 '장수 석기'의 주인이 되었다. "잘 생각했다. 고맙다. 이제부턴 네가 '장수 석기'일을 모두 맡아라." 아버지는 아들이 반갑고도 대견스러웠다. 요즈음 부모의 말을 이처럼 순순히 따라 주는 자식이 어디 그리 흔한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아버지가 도와 주셔야지요. 저는 아직 그릇 하나 제대로 깎을 줄도 모르는데요." 최 선생님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염려하지 마라. 네가 일을 익힐 때까진 내가 돌봐 줄 테니까." 최 선생님은 30살의 한창 나이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일을 배웠다. 온통 돌더미와 깎아 낸 돌가루에 묻혀 생활했다. 돌그릇 만들기는 돌을 캐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최 아저씨의 공장 '장수 석기'는 장수읍에서 택시로 포장되지 않은 길을 30분 달려야 닿는 산골 중의 산공인 구암 마을에 있다. 구암 마을 뒷산인 개등산에서 곱돌을 캐 온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인 곱돌을 쇠톱과 착암기(바위에 구멍을 뚫는 기계)를 써서 쓰임새별로 자른다. 다음에는 연마기로 모양을 다듬는다. 이런 곱돌그럿 만드는 과정은 나누어 하게 되어 있어서, 개등상 채취장에서 곱돌을 캐내는 사람은 돌만 캐고, 자르는 사람은 돌만 자르고, 연마하는 사람은 돌 모양 다듬는 일만 전문으로 한다. 최 아저씨는 이 세 과정을 차근차근 익히는 데 꼭 3년이 걸렸다. 최 아저씨는 곱돌그릇 만드는 기술을 다 익힘으로써 '장수 석기'는 탄탄한 터 위에 앉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1957년에 세워져 16년이란 세월이 흐른 데다 아버지와 아들이 최고 기술을 가지고 있고 힘을 합쳐 운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수 석기'의 곱돌그릇은 점점 이름이 나기 시작하여 외국에까지 수출하게 되었다. 산골 중의 산골인 구암 마을까지 외국 상인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정도로 곱돌그릇의 힘은 센 것이었다. '장수 석기'를 찾은 외국 상인 공장 안을 살펴보고 놀란다. 귀를 멍하게 하는 기계 소리, 날리는 희뿌연 돌가루, 공장 바닥을 밟으면 푹신할 정도로 깔린 회색빛 곱돌 가루를 보고 여기서 무슨 물건이 만들어지겠느냐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만들어져 있는 촛대, 향로, 붓통, 보석함, 찻상 벼루 등의 곱돌 작품을 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원더풀, 원더풀!" 외국 상인은 훌륭하다는 말을 연발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정말 힘들여 만드는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하는 것이다. 외국 상인은 그 자리에서 주문을 한다. 주로 촛대, 향로, 보석함, 찻상 등을 많이 주문한다. 그리하여 '장수 석기'의 곱돌그릇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대만 등 동남 아시아로 많이 팔려 나간다. 최 아저씨는 주문을 받으면 물건을 보내 주기로 한 날은 밤을 새워서라도 지킨다. 무리다 싶으면 아예 주문을 안 받는다. 외국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만큼 약속을 물건을 사고 파는 일만큼 중요하게 여긴다. 최 아저씨는 '장수 석기'를 맡아 운영하면서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일이 없다. 그래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다. 최 아저씨는 물건도 물건이지만 이런 조그만 것도 외국인들에게 나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일한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외국 수출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곱돌그릇이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돌솥이나 고기 구이판, 뚝배기 등을 쓰는 식당과 가정이 늘어났다. 또 주요 백화점, 관광지의 특산물 기념품 판매점등에서도 곱돌그릇은 널리 팔린다. 특히 곱돌 불고기판으로 고기를 구우면 고기가 타지 않고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져 고기의 제맛이 난다고 한다. 그리고 굽는 중엔 기름이 튀지 않고 열을 오래 간직하는 성질이 있어 불을 끈 상태에서도 따끈한 고기맛을 즐길 수 있다. 최 아저씨의 곱돌 깎기는 어느 새 20년을 넘어섰다. 집의 한쪽 벽에는 상장이 가득 붙어 있고, 상패도 빽빽이 늘어 서 있다. 상장과 상패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최 아저씨의 이름이 적혀 있다. 공예품 경진 대회에서 받은 표창장과 도지사 등으로부터 받은 감사패로, 삼대에 걸쳐 타다 놓은 것이다. 그 때 출품했던 보석함, 벼루, 향로 등의 작품은 별채를 정리하여 전시해 놓았다. 비싼 것이지만 팔지 않는단다. 판매용 곱돌 석기들은 따로 공장 옆에 전시실을 마련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곱돌솥이나 곱돌 구이판이 대부분이다. 최 아저씨는 산골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팩시밀리(사진, 문자, 도면 등을 전시 신호로 바꾸어 전송하면 수신 신호를 본래의 상태로 나타내고 기록하는 통신 방식)를 갖추고 있다. 팩시밀리로 수출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최 아저씨는 오늘도 향토 특산품의 맥을 잇기 위해 회색 돌가루를 뒤집어쓴 채 곱돌을 캐고, 자르고, 갈고, 다듬는 일손을 바삐 놀린다. @ff 7. 칠백 년 하회탈의 맥을 잇는다.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 마을. 이 곳은 탈춤으로 이름을 떨치던 마을이다. 탈춤 중에서도 하회 별신굿 탈놀이로 유명하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탈춤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이 탈놀이에 쓰는 탈은 모양만 봐도 저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재미있다.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걸 보면 속이 후련하다. 양반들이나 지도자들의 잘못을 속이 시원하게 꼬집어 주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또 손꼽힌다. 이 별신굿 탈놀이에 쓰이는 탈을 17년째 공들여 만들어 오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남이야 인정하든 말든, 알아 주든 말든, 내 고장의 탈을 잘 만들어 탈놀이를 되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탈 만들기에 힘을 쏟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김완배(40살)씨이다. 오늘도 김 아저씨는 나무를 자르고 파내며 탈 만드는 데서 손을 놓지 않는다. 김 아저씨의 탈 만들기는 17년 전인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마을 탈놀이가 사라져 가니 큰일입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온 탈놀이를 우리가 살려내지 못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맞아요, 내 고장 문화를 되살릴 의무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있어요." 안동의 뜻있는 젊은이들과 학생, 예술인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한 뒤 하회 별신굿 놀이를 되살리자는 데로 뜻을 모았다. 김 아저씨도 이 자리에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김 아저씨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탈춤을 함께 추면서 탈놀이를 되살리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무척 흥겹고 신명나는 춤이었으나,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 아저씨는 공예가였으므로 당연히 하회탈을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전혀 보지도 못한 탈을 어떻게 만든담!" 하회탈은 그 때 이미 맥이 끊어져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김 아저씨는 하회탈을 되살려야만 탈춤도 되살아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김 아저씨는 우선 탈을 만들기 위해 하회탈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실물은 구할 수가 없었다. 박물관에는 보존이 되어 있었으나 눈으로 보는 것 외엔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사진을 구했다. 사진을 보고 생김새나 특징 등을 자세히 연구했다. 또 책을 통해서 하회탈의 유래나 만드는 과정을 조사해 익혔다. 막상 탈을 만들어 보니 생각보다 무척 어려웠다. 보통 공예보다 더 힘이 들었다.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조각칼로 파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팔이 저리고 아팠으며, 손에는 물집까지 생겼다. 손을 여러 번 다치기도 했다. 김 아저씨의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하회탈을 새로이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음 만든 것이라 사진에서 본 것만큼 완전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기의 걸음마만큼이나 중요한 첫걸음을 ㄸ 놓은 것이 기뻤다. 이러한 노력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정말 장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별말씀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데요, 뭐." 김 아저씨는 겸손해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어요. 환배 씨가 처음으로 그 일을 해낸 것이 중요하지요." 김 아저씨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 보존회의 중요한 직책도 맡게 되었다. "저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맡겠습니까?" "탈춤도 출 줄 아는 데다 탈까지 만드는 사람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김 아저씨의 눈부신 활약은 널리 알려졌다. 탈 만들기도 처음에는 사진을 보고 만드느라 모양을 흉내 내기에만 바빴다. 탈의 표정을 되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회탈 제작도 어느 정도 수준에까지 올랐다. 김 아저씨는 여기저기로 초청되어 갔다. 하회탈의 특징과 제작 방법에 대한 강연이었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신앙 정신도 깃들여 있습니다. 다른 탈놀이에서는 탈춤이 끝난 뒤에 뒤풀이에서 한 번 썼던 탈을 모두 불태워 없애는데, 하회 탈놀이에서는 탈을 태우는 뒤풀이가 없는 점이 그걸 말해 줍니다." 그리고 탈춤을 처음에 시작할 때 다른 탈놀이에서와는 달리 탈을 모셔 내오는 의식을 하고, 탈춤이 끝난 뒤에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잘 보관하여 다음 탈춤에 다시 사용한다는 것을 꼭 얘기해 주곤 했다. "그래서 다른 탈춤에 쓰이는 탈춤에 쓰이는 탈이 종이 또는 바가지로 간편하게 만드는 데 비해 하회탈은 나무를 조각해 틈틈하게 만듭니다." 김 아저씨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탈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하회탈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탈을 만들었으나, 어느 새 김 아저씨의 생업이 되었다. 김 아저씨의 탈 만드는 솜씨도 몰라보게 달라져 하회탈의 특징까지 살려냈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에는 9개의 탈이 등장한다. 양반탈과 선비, 중, 각시, 부네, 초랭이, 이매, 할미, 백정 등이다. 이 탈들은 하나같이 특징이 있다. 양반탈을 예로 들면, 그 표정이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울 수가 없다. 턱이 얼굴과 떨어져 있어 턱의 위치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탈의 광대뼈 윗면을 앞으로 수그리면 화난 얼굴이 되는 듯 표정이 갖가지다. 김 아저씨가 하회탈의 9가지 모양을 마을대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몇 단계를 거쳐야 했다. 첫단계는 모양 정도를 본떠 내고, 칼 사용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탈의 표정을 살려내는 일이다. 탈마다의 독특한 표정을 읽어 가며 작업을 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는 그 역할이 가진 뜻까지 생각하며 탈을 조각하는 것이다. 김 아저씨는 최근에야 세 번째 단계를 익히게 되었다. 탈을 만들기 시작하고부터 80년 이전까지의 김 아저씨의 생활을 무척 어려웠다. 탈만 만들어 살아가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두 사람이 한달 꼬박 만들어야 40개쯤 만들 수 있다. 하회탈이 모두 9개가 한 벌이니 한 달 내내 만들어야 5벌쯤 만들 수 있다. 그 때는 주문도 흔하지 않아 생활을 늘 쪼들렸다. 그러나 굽히지 않고 일을 했다.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 그 과정이 까다롭고 복잡하다. 하회탈의 재료는 원래 오리나무이다. 요즈음은 이 단단한 오리나무가 없어 피나무를 쓰는데, 피나무마저 구하기 힘들어 소련에서 사들여 와 쓴다. 이 피나무를 두께 10cm 정도로 잘라 코를 중심으로 해서 얼굴 윤곽을 잡는다. 그런 다음 칼로 파내어 윤곽을 완전히 드러나게 한다. 다음엔 광대뼈 위의 얼굴과 턱을 떼어 떨어지게 하고, 칼질로 모양을 완전히 다듬는다. 그런 뒤 사포로 면을 고르게 다듬고, 마지막으로 토분(흙바루)과 옻칠을 해 완성시킨다. 요즘은 옻칠 값이 워낙 비싸서 주로 락카칠로 대신한다. 김 아저씨는 그래도 요즘은 생활 형편이 좀 나아졌다. 1980년대에 이르러 일반 사람들의 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라서 주문도 늘어 탈을 다 만들어 주자면 날짜가 빠듯하다. 값도 비싸져 김 아저씨가 만든 탈은 7만~10만 원을 받는다. 꼬박 하루를 걸려 탈 하나를 만들어 낼 때마다 김 아저씨는 오늘의 가면을 한 꺼풀 벗겨 낸 것 같은 기쁨을 맛본다. @ff 8. 우리 옛 떡맛을 지킨다. 바깥은 아직 캄캄한 새벽 4시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광순(48살) 아주머니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아주머니는 옷을 주섬주섬 찾아 입고 부엌으로 나갔다. 눈이 아플 정도로 불빛이 눈부시다.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물에 담그어 두었던 쌀을 건졌다. 쌀이 알맞게 불었는지 살펴본다. 손으로 만져 보니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잘 불었구나." 이 아주머니는 혼잣말을 하고는 옆으로 밀쳐 놓는다. 그리고 떡 만들 때 쓰는 콩고물이나 깻가루, 밤, 대추 같은 다른 준비물을 하나하나 챙겼다. 이 아주머니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30년 가까이 지켜 온 일과다. 이 아주머니가 바로 우리 고유의 떡맛을 3대째 지켜 오고 있는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1번지의 '낙원 떡집' 주인이다. '낙원 떡집'은 외할머니로부터 어머니, 딸로 이어지는 3대가 70년 동안이나 대를 물려 맛이 별난 떡을 만들어 왔다. 이 아주머니는 그날 그날 주문받은 떡을 만들기 위해서 날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것이다. "백일 떡이 한 집, 돌떡이 석 집, 회갑 떡이 두 집이구나." 이 아주머니는 노래하듯이 하루에 만들 떡을 기억한다. 주문받은 떡이 많을 때는 밤을 꼬박 새우기까지 한다. 떡 주문을 받다 보니 이 아주머니는 누구 집 딸이 결혼하고, 주고 집 손자가 돌이라는 등 남의 집안 사정도 저절로 다 알게 된다. '3대 떡집'으로도 불리는 유명한 '낙원 떡집'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20년이다. 이 아주머니의 외할머니가 차린 떡집이다. "우리도 서울로 가는 것이 어떨까요? 살림이 자꾸 쪼들려만 가잖아요?" 김사순 아주머니는 남편에게 서울로 이사하기를 권했다. "서울에 간다고 무슨 좋은 일이 있겠소?" 남편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이사를 간다고 당장 형편이 나아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시골보다야 벌이가 낫지 않겠어요?" 김 아주머니는 막연하지만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그렇다면야 나도 가고 싶소." "아무래도 여기보다야 나을 테니 한번 이사해 봅시다." "좀더 차근차근 생각해 보고 그렇게 합시다." 남편도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한 ㄱ에 서울로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김 아주머니 가족은 곧 경기도 양주를 떠나 서울로 왔다. 막상 서울엔 왔지만,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거의 맨손으로 왔으니, 돈을 들여 일을 해 본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김 아주머니가 하루는 낙원동 떡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골목에 떡집이 많이 모여 있어 떡골목이라고 불렀다. 시골에서는 보지 못한 떡들이 많았다. 모양도 좋은 떡들이 기름기가 반들거려 군침이 넘어갔다. "저런 떡이나 실컷 먹어 봤으면..." 김 아주머니는 떡이 먹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면 떡을 좀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문득 떡 장사를 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떡 장사를 해보자!" 김 아주머니는 이튿날부터 떡 장사를 시작하였다. 머리에 이고 골목골목을 다니며 떡을 팔았다. 목이 붓고, 다리가 퉁퉁 부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팔았다. 덕분에 쪼들리던 생활도 좀 나아졌다. 팔다 남은 떡은 식구들이 나누어 먹을 수도 있어서 좋았다. 김 아주머니는 떡 장사를 하는 틈틈이 자신이 팔고 있는 떡을 집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잘 안 되면 떡집에 가서 물어 보며, 떡 만들기를 익혔다.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돈도 모았고, 떡 만드는 법도 거의 익히게 되었다. "여보, 이제 우리도 떡집을 내야겠어요." 김 아주머니는 남편에게 의견을 물었다. "떡 만들기야 당신이 배웠으니 되겠지만, 돈이 어디 있소?" "저축해 둔 돈이 있어요." "당신이 생각해 보고 가능하면 해 봐요." 마침내 김 아주머니는 떡집을 차리게 되었다. '낙원 떡집' 문을 여는 날에는 잔치도 벌였다. 김 아주머니는 궁궐에서 살던 사람에게서 떡 만들기를 배운 덕분에 궁중 떡을 만들어 팔았다. 이것은 두고두고 '낙원 떡집'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어느덧 김 아주머니도 나이가 많아져, 떡 만들기가 힘들어졌다. 8.15 해방되기 바로 전이었다. 김 아주머니는 5남매 중 넷째 딸인 인동이를 불렀다. "내가 보기엔 너의 솜씨가 가장 좋은 것 같다. 이젠 이 떡가게를 네가 맡아서 꾸러 가거라." 김 아주머니는 넷째 딸에게 떡집을 물려준 것이다. '낙원 떡집'을 물려받은 김인동 아주머니는 쌀이 흔하지 않던 그 때 수수떡이나 좁쌀떡을 빚으며 가게를 꾸려 나갔다. 떡을 만들어 팔았지만, 생활은 넉넉하지가 못했다. 그래도 떡 만드는 일은 재미가 있었다. 6.25가 터진 뒤 피난길에서도 떡을 만들어 판 것은 그 때문이었다. 6.25의 상처도 아물고 김인동 아주머니의 떡집도 전처럼 떡이 잘 팔렸다. 20여 년 동안 떡을 만들어 온 김인동 아주머니는 가게를 맏딸인 광순이에게 맡겨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맏딸은 이미 고등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꺼을 만들어 고등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제법 떡을 잘 빚었다. 어머니는 딸을 불어 낮혔다. "광순아,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니?" 어머니는 가게를 맡으라는 말은 뒤로 숨기고 짐짓 장래 희망을 묻는 척했다. "시인이 되고 싶어요." 광순 학생은 시를 즐려 읽고 썼다. "시인?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옛말처럼 되기 어려운 시인보다는 엄마와 같이 떡이나 만들자." 어머니는 넌지시 딸의 생각을 물었다. "예? 떡을 만들라고요?" 광순 학생은 깜짝 놀랐다. "놀라긴. 떡 만드는 게 어때서?" "싫어요. 저는 시인이 될 거예요." 어머니는 몇 번이고 딸을 달래어 마침내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이광순 아주머니는 여고를 졸업한 뒤 곧바로 어머니는 도와 떡을 빚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아주머니가 특히 잘 만드는 떡은 '갖은 시루떡'과 '오색경단'이다. 갖은 시루떡은 밤, 대추, 잣, 버섯 등 고명을 멥쌀, 찹쌀가루와 섞어 찌는 떡이다. 오색경단은 동그랗게 빚은 경단 위에 노랑콩, 파랑콩, 카스텔라, 계피, 검은 깻가루를 입힌 것이다. 이 아주머니의 어머니인 김인동(64살) 할머니는 11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가 로스앤젤레스 웨스턴 거리에 낙원 떡집의 미국 분점을 차렸다. 그 때부터 이 아주머니는 서울의 낙원 떡집을 맡아 대대로 이어온 궁중 떡을 빚고 있다. 이 아주머니가 빚는 떡은 22가지니다. 그 중에서 무지개떡, 꼬리꽃떡, 갖은시루떡 같은 이름은 우리가 들어 보지 못한 떡 이름들이다. 이 아주머니의 떡 만드는 솜씨는 우리 나라의 여러 신문,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뿐만 아니라 일본 신문에까지 소개되었다. 이 아주머니는 자신의 떡 만드는 솜씨가 슬하의 3남매 중 누구에게로 이어질지 무척 궁금해한다. @ff 9. 붓 한 자루에 온 정성을 모아 "아버지, 저 머슴살이 그만둘랍니다." 박순 청년은 며칠을 벼른 끝에 아버지 앞에서 입을 열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왜 그만두겠다는 거냐?" "지긋지긋해서요." "지긋지긋하다니! 밥 벌어 먹는 일인데 쉬운 일이 어디 있느냐. 당장 그만두면 달리 할 일이 있느냐? 어디라도 알아보고 하는 소리냐?" "저는 구두 신고, 자전거도 타 보고 싶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 형편에 구두 신고 자전거를 타다니?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얘기냐?" 박 청년의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부터 60여 년 전에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면 요즘 자가용을 갖고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머슴살이 해 봐야 평생 지게만 질 게 아니에요. 저도 남들처럼 살아 보고 싶어요." 박 청년은 자신의 운명을 바꿔 볼 결심이었다. 지게를 지고 고된 일만 하는 자신이 한탄스러웠던 것이다. 이젠 좀 떳떳하게 살아 보고 싶었다. "잘 생각해 봐라. 머슴살이라도 치우면 당장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 아니냐?"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그 때문에 이러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돼요. 머슴살이를 치우고 나서 생각해 봐야지요." 아버지는 몇 번이고 말렸지만, 박 청년은 이틀 뒤에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나니 당장 마땅한 일이 없었다. 궁리 끝에 붓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문득 이웃 마을에서 필방을 하고 있는 외삼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길로 외샹촌에게로 달려갔다. "순이가 웬일이냐?" "외숙부님 붓 만드는 것 구경하러 왔어요." "갑자기 붓 만드는 걸 구경하고 싶다니?" 외삼촌이 어리둥절해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저어, 사실은 머슴살이를 그만두었어요." "참말이냐?" "에" "그럼, 어떻게 살아가려고? 아버지가 허락하시던?" "말리셨는데 제가 우겨서 그만뒀어요." "왜 그랬니?" "평생 머슴살이는 할 수 없잖아요. 저도 돈 벌어 구두 사신고, 자전거도 타 보고 싶어서요." "허허, 그래? 꿈이 크구나." 외삼촌도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외숙부님, 저도 붓을 만들고 싶어요. 좀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붓을 만들면 자전거를 탁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건 모르겠고요, 우선 일자리가 없으니 뭐든지 배워야지요. 머슴살이보다야 훨씬 낫지요." "그래라, 나도 제자가 생겨 즐겁구나." 그 때, 박 청년의 나이가 19살이었다. 서재에 갖춰야 할 종이, 붓, 먹, 벼루 이 네 가지를 문방 사우라고 한다. 박 청년이 그 중의 하나인 붓 만드는 기술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붓 만들기에 60년을 바쳤다. 오직 한 길만 걸어왔다. 그야말로 외길 인생이다. 청년 때 시작, 79살의 할아버지가 된 지금 붓 만들기의 일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 630의 14호. 양지바른 작은 마을 '백양당'의 박순 할아버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작은 마루가 온통 붓 만드는 필방이다. 환히 밝혀진 불빛 아래서 주름진 손을 쉴 새 없이 놀린다. 빗에 빗겨진 하얀 털이 쌓인다. 이렇게 빗고 다듬은 염소털로 서예용 붓을 만든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양모필을 만들기 시작했던 박순 할아버지. 처음엔 족제비나 노루털을 사용한 붓 만들기 기술을 배웠다. "너도 이제 그만하면 다 배운 셈이다. 지금부터 너 스스로 붓을 만들어 봐라." 박 청년이 외삼촌 아래서 족제비나 노루털을 명주실로 묶어 송진을 발라 붓 만드는 법을 배운 지 7년이 지났을 때다. 외삼촌은 이제 더 가르칠 게 없으니 독립해서 붓을 만들어 보라고 말했다. "외숙부님, 고맙습니다. 잘 가르쳐 주셔서 빨리 배웠습니다." "아니다. 네가 열심히 배웠기 때문이다. 부디 훌륭한 필공(붓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 "예, 외숙부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겠습니다." 박 청년은 곧 붓 만드는 연장을 사서 집에다 필방을 차렸다. 처음에는 혼자서 만들었다. 그러나 주문이 늘어나면서 직공을 쓰기 시작, 얼마 뒤에는 일고여덟 명의 직공을 두게 되었다. 이만하면 나도 남 못지않은 필공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붓을 만들고 있던 어느 날 붓을 팔러 다니는 상인이 찾아왔다. "붓 사시오." "여기가 필방인데 붓은 무슨 붓을 사요? 안 삽니다." "안 산다니까요." "이건 우리 나라 붓이 아니고 중국 붓입니다. 한 번 보기나 하십시오." "허 참,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보기나 합시다. 이리 오시오." 상인은 보따리를 풀고 마루에다 붓을 펼쳐 놓았다. 그 때 처음으로 중국 붓을 구경하게 된 박 청년은 우리 붓보다 중국 붓이 훨씬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국에 가서 붓 만드는 법을 다시 배워야겠구나' 하고 그 날 밤 박 청년은 결심했다. 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하자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외삼촌은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외삼촌에게 아버지는 설득해달라고 부탁해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 때 마침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어서 일본 사람들이 성가시게 굴었다. 그래서 애써 차린 필방을 치우고, 어려운 절차를 밟아 중국 땅에 들어섰다. 그 길로 붓 만드는 고장으로 이름난 만주 봉천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예문도구'라는 회사의 종업원으로 일했다. 박 청년은 32명의 종업원과 열심히 일했다. 그 곳의 붓공장은 한 사람이 붓 한 자루를 와전히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요즘의 큰 공장에서 공산품을 만드는 과정처럼 32명의 종업원이 각각 부품을 만들어 조립을 했다. 3년 동안 붓 만드는 법을 완전히 익힌 박 청년은 스스로 중국 붓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온 마을 사람들이 진짜 훌륭한 필공이 태어났다며 반가워 했다. 이름난 한국 화가인 허백련 선생은 박 청년을 찾아와 '필공'이라는 호까지 지어 주었다. '붓다운 붓을 만들어 이런 사람들에게 보답해야겠다' 박 청년은 이렇게 다짐하고 고향에서 다시 필방을 차렸다. 정성을 쏟아 붓을 만들었다. 그러나 박 청년은 자꾸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듯했다. 무언가 덜 배웠다는 느낌이었다. '아직 난 다른 지방의 붓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이렇게 생각한 박 청년은 눈을 넓히기 위해 서울로 갔다. 종로구 낙원동 '대신당' 필방으로 자리를 옮겨 서예가인 김충현 선생 등의 붓을 만들어 내는 한편 제자를 길렀다. 30여 년 동안이나 그 곳에서 붓 만들기를 익힌 필공 선생은 이제야 혼자서 붓을 만들기에 부끄럽지 않겠다고 여겨 고향으로 내려와 지금의 '백양당'을 차려 20년에 이르렀다. 붓 만드는 과정은 무척이나 힘들고 까다롭다. 먼저 아무렇게나 뽑은 양모를 구입하면 붓감이 될 만한 털을 골라 빗으로 수백 번 빗어 낸다. 털이 골라지면 왕겨를 태운 재 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다리미로 눌러 털 속의 기름기를 뽑아 낸다. 기름기를 잘 빼지 못한 붓으로 글씨를 쓰면 먹물이 스며들지 않아 끝이 갈라져 글씨가 잘 써지지 않는다. 그 다음 저울에 무게를 달아 끝을 묶고 밀(밀랍)로 붙여 대나무 대롱에 끼워 완성한다. 박 할아버지는 온종일 10개 정도의 붓을 만들고 있으나, 요즈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많이 만들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 나라 서예가들 거의가 박 할아버지의 붓을 쓰고 있기 때문에 쉬지 않고 붓을 만든다. @ff 10. 다시 태어나도 길쌈꾼이 되겠어요. "분령아, 그만 울거라. 분 다 지워진다. 오늘같이 좋은 날 자꾸 울면 우짜노. 나도 마음이 아프다." 딸을 달래던 어머니도 마침내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허 참, 임자가 울면 우짜노." 남편이 엎에서 보다가 아내를 나무랐다. "그만 울거라. 시집가는 날 자꾸 우는 거 아니다." 아버지도 딸을 달랬다. 그래도 딸을 가마에 오르기 싫어 자꾸 눈물을 흘렸다. 옆에 둘러선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혀를 끌끌 찼다. 어떤 사람은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어머니!" 딸은 어머니 품에 안겼다. 어머니는 딸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래, 이제 그만 그치거라." "어머니!" "오냐, 오냐." 딸은, 시집가면 언제 또 친정에 올 수 있을까,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열일곱의 어린 나이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그 유명한 베짜기 마을인 금소동으로 시집을 가게되어 평생 밤낮 가리지 않고 길쌈을 해댜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금소동이라면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의 이름 높은 안동포의 본고장이 아닌가. 예로부터 이 금소동 마을에 태어나거나 시집온 여자들은 평생을 베틀 위에서 보내야만 했다. "어머니!" 분령 처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어머니는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가마에 오르거라." 딸은 가마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뒤로 돌아섰다.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안동포 본고장 마을 사람이 된 분령 아주머니는 시집간지 열흘도 안 되어 베틀 위에 앉았다. 집에서 어머니를 따라 가끔 베를 짜 보았만, 시집에서 베를 짜니 새롭고 또 낯설게 느껴졌다. "아가야, 북은 이렇게 넣는 게 쉽다." 시어머니가 곁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하여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베를 짜기 시작했다. 좀 서툴게는 보여도 알뜰히 베를 짜는 며느리의 모습에 시어머니는 흐뭇해했다. 분령 아주머니는 베 짜는 일보다 실을 만드는 일이 더 힘들었다. 삼을 베어 쪄서 껍질을 벗기고, 말려 실을 만드는 일을 무척 어려웠다. "아가야, 베 짜는 일을 하자면 1년 내내 쉴 새 없이 삼을 손질하고 베틀에 매달려야 한다." 시어머니는 자신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 왔다며 입버릇처럼 이 말을 되풀이했다. 안동포는 마을 여자들이 온통 베를 짠 것으로도 유명했다. 가늘고 고운 짜임새와 바람이 잘 통해 땀이 나도 몸에 붙지 않아 무명이나 모시 못지않게 여름옷으로 좋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동포는 우리 나라 특산품으로 꼽힌다. 아주 옛날 낙동강 유역 농가에서 삼을 길러 삼베를 짜기 시작한 뒤로 그 품질이 우수해 조선 시대에는 임금님에게 바쳐지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포의 역사는 길다. 신라 선덕 여왕 때 부녀자 길쌈 대회에서 안동포가 1등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때 여왕이 삼베를 아주 빨리 촘촘하게 짜는 데 감탄하여 안동포를 화랑도 단복으로 삼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배분령 아주머니의 베 짜는 솜씨는 10여 년이 지나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가 되었다. 배 아주머니가 짠 삼베를 팔아 집안을 꾸려 갈 정도였다. "아가야, 이제 그만 자거라. 그러다가 병 날라." 배 아주머니가 이틀 밤을 새워 가며 베를 짜자 보다못한 시어머니가 베 짜는 것을 말렸다. "어머님도, 이까짓 일하고 무슨 병이 나겠어요?" 배 아주머니는 베틀에 올라앉으면 신이 들린 듯했다. 어쩌면 베틀 짜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베 짜는 솜씨가 여간 아니에요. 젊은 사람이 베를 그렇게 잘 짜기는 어렵지요. 처음 봐요." 이웃 사람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배 아주머니는 시어머니가 말렸지만, 베 짜는 손을 놓고 싶지 않았아. 보통 사람들은 한 필(10m)를 짜는 데 일 주일 정도 걸리고, 온종일 8~9자(2~3m) 밖에 짜지 못한다. 그런데 배 아주머니는 3일 만에 한 필을 짜내는 솜씨였다. 마을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잠을 좀 자면서 일해야지, 그렇게 무리하면 안된다." "어머님도, 걱정 마세요." 배 아주머니는 한 필을 더 짜내고 잠을 잘 생각이었다. 무릎이 저려 오고 팔이 아팠지만 이를 악물었다. 졸음이 올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베전을 살펴보니 갈색 마포가 들어찼다. 농포, 세포, 의포, 안동포, 베는 바리 안에 드는 베라. 배 아주머니의 베 짜는 솜씨는 나날이 달라졌다. 베도 잘 팔려 집안 살림을 꾸려 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70년 이후부터 길쌈군이 해마다 줄어들었다. 베 짜는 일은 무척이나 힘드는 데 비해 그 대가가 적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베 짜는 일을 그만두었다. 삼을 심어 기르던 발에 다른 농작물을 심어 더 많은 소득을 올렸다. 배 아주머니도 베 짜기를 그만둘까 하다가 참았다. 베 짜는 일을 하지 않으면 너무 생활이 재미없을 것 같고, 허전해질 듯했다. '나라도 짜야지, 다 그만두면 상복감은 누가 만드나?' 배 아주머니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마침 이웃에 베 짜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외롭지 않았다. 배 아주머니는 다른 지방의 토산품으로서 베는 거의 사라졌지만 안동포만은 그 이름이 이어져 오고 있어 여간 자랑스럽지 않다. 그렇게 된 것도 자신이 열심히 베를 짜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다시 한 번 한다. 어느듯 배 아주머니도 회갑을 맞았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모여들었다. 온 집안이 그득했다. "우리 베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손자, 손녀들이 베 할머니라고 불렀다. 배 할머니는 그말이 싫지가 않았다. 이웃에서도 베 할머니로 통했다. 배 할머니는 40여 년동안 베를 짜 온 보람이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베를 잘 짰기 때문에 손자나 손녀, 이웃이 그처럼 부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할머니,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베 짜는 일도 조상의 얼을 빛내는 거래요." 국민 학교에 다니는 손자가 배 할머니 무릎에 앉으며 말했다. "으음, 그래?" 배 할머니는 마음이 흐뭇했다. 배 할머니는 그 뒤로도 베 짜는 일손을 놓지 않았다. 큰 아들도 극구 말렸지만, 신들린 사람처럼 베를 짰다. 베틀에만 앉으면 온갖 잡념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잠이 안 오는 밤에 베틀 위에 앉으면 마음도 타분히 가라앉는다. 80살을 넘긴 배 할머니는 백발이 성성한 지금도 베틀 위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려도 베 짜는 일에서 손을 놓지 못한다. "나는 베를 짜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다시 태어나도 역시 길쌈꾼이 되겠다." 그것이 배 할머니가 지니고 있는 생각이다. 인간 문화재(75년 지정)로서 배 할머니의 마음가짐은 이처럼 남다르다. @ff 11. 옹기장이 할아버지 "이젠 혼자서 안 되겠는걸. 조금만 힘을 써도 원 이렇게 손이 떨리니..." 이 할아버지는 그릇을 빚다 말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할아버지는 큰아들에게 그릇 굽는 일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요즈음 그릇 빚기가 어려웠다. 팔이 저리고 손이 떨리는 것이었다. '65살을 넘긴 지가 어젠데, 내가 이렇게 늙었나?' 이 할아버지는 쓸쓸한 생각도 들었다. 옹기다운 옹기를 구워 보지 못하고 아들에게 일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종각 할아버지 옹기여야 장맛이 난단 말이야." "누가 아니래요. 김치 맛을 내자면 종각 할어버지네 독에 김치를 담아야 된다니까요?" "그러니 종각 할아버지네 옹기가 한국서 최고라지요. 숨 쉬는 오지그릇이라고 하던대요." 옹기를 사 가는 사람들의 이런 찬사도 이 할아버지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맘에 드는 그릇을 구워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늘 구워 낸 옹기가 성에 차지 않았다. 그 날 저녁 잠자리에 누운 이 할아버지는 60년 넘게 해 온 옹기 굽기 일을 되돌아 생각해 보았다. 먼 산길을 걸어온 듯했다. "종각아, 넌 나하고 옹기 굽는 일이나 하자." 종각 소년이 9살 때였다. 아버지가 종각 소년의 손목을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싫어요, 나도 형처럼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싶어요. 서당에 갈래요." "아니다. 형은 우리 집안 대를 이을 것이니 글을 배우고, 넌 셋 중에서 제일 건강하니 내 일을 배워야 된다." 아버지의 엄한 말씀에 종각 소년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 때부터 아버지 옆에서 오지그릇 만드는 일을 배우기 새작했다. 옹기장이였던 아버지 밑에서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처음엔 좋은 흙을 고르는 것을 익혔다. 그리고 반죽하는 일을 배웠다. "이거 종각이가 반죽했니?" 하루는 아버지가 종각 소년을 보고 물었다. "예, 제가 했어요." "뭐가 빠진 것 같구나." "뭐가 빠졌는데요?" "재를 안 섞고 흙만 가지고 했구나." 옹기 만들기 첫 단계인 반죽은, 흙과 재를 같은 양으로 섞어 잿물에 걸러 내는 일이다. 그런데 종각 소년은 흙만 버무려 두었던 것이다. 반죽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종각 소년은 힘이 빠져 늘어져 눕기도 하고, 손이 터져 피가 나오기도 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쉽지 않은 법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제대로 배울 수가 없다. 더더구나 성공하기는 어렵다." 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반죽하는 일을 몇 년을 했는데도 아버지는 그릇 빚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 "아버지, 저도 그릇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벌써 물레장일을?" 아버지는 놀라는 눈치였다. "이만하면 반죽을 잘 하잖아요?" 종각 소년은 아버지 눈치를 보며 반죽해 놓은 흙을 가리켰다. 아버지가 반죽 흙을 두 손가락으로 비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되겠다. 빨리 배운 셈이다." 종각 소년은 뛸 듯이 기뻤다. 다른 사람에 비해 반죽 일을 빨리 배운 것이었다. 아버지처럼 커다랗고 멋진 옹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막상 물레를 돌리며 옹기를 빚었으나, 모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엎구리가 들어가 쭈그러지거나 길쭉한 모양으로 빚어졌다. 며칠을 만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종각 소년은 울고 싶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허허, 마음대로 안 되지?" 하며 거들어 주었다. 물레를 온종일 돌리고 나면 팔과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저녁엔 끙끙 앓았다. 그러기를 여러 해, 종각 소년도 청년이 되면서 아버지만큼 좋은 모양의 옹기를 만들 수 있었다.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동성리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어엿한 옹기장이가 된 것이다. 집 앞에는 바다가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새우젓배가 줄을 이었다. 그들은 종각 청년과 아버지가 만든 새우젓독을 사 갔다. 그리고 크고 작은 옹기들이 배에 가득 실려서 가까운 장터로 나가기도 했다. 그만큼 좋은 옹기로 소문이 났던 것이다. 그 뒤로 바다를 막아 옹기들은 트럭에 실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든 옹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다.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튼튼했고, 김치 맛을 더하는 데는 나무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몸에 해로움을 주는 유약을 쓰지 않은 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였다. 옹기를 굽는 가마는 한 달이 멀다 하고 꽉꽉 찼다. "종각아, 우리 가마는 우리 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것이란다. 암, 너희 할아버지가 잘 만들었지. 우리 것만 땅굴로 돼 있어. 불통하고 가마칸이 구별돼 있는 통가마지." 아버지는 구울 옹기를 가마에 채울 때마다 아들에게 자랑했다. 옹기도 잘 구워져 나왔다. 옹기를 구울 때는 거의 일 주일을 밤샘했다. 꼬박 불을 때야 하기 때문이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종각 청년은 불통 앞에서 장작을 넣으며 아버지에게 배운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는 엣날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두 트럭분의 나무(장작)가 다 탔다. 뜨거운 불통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졸음을 쫓으며 불꽃을 지켰다. 종각 청년도 얼굴에 주름이 하나 둘 늘어갔다. 그럴수록 기술도 늘어 옹기는 더욱 잘 만들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유명한 부자 옹기장이로 소문이 났을 때는 50살이 넘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의 모든 일을 맡겼다. 옹기도 많이 팔려 집안 형편도 좋아졌다. 종각 청년도 어느새 옹기장이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종각 할아버지가 61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젠 정말 잘 만들어야겠구나. 그래야 아버지 이름을 더럽히지 않지.' 이 할아버지는 주먹을 불끈 쥐며 굳게 다짐했다. 힘이 새롭게 솟는 듯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부엌 살림에 서양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벼운 플라스틱과 메어다 꽂아도 깨지지 않는 스테인리스 그릇들이 홍수처럼 밀려와 자리를 빼앗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사할 때나 사용할 때 편리하다며 이런 그릇들만 좋아했다. 땔감이 기름으로 바뀌고 새로운 유약이 만들어지면서 옹기 그릇의 색깔도 신식 바람에 병들어 제 모습을 잃어 갔다. 이상하게 반들반들해졌다. "옹기가 안 팔리니 어쩌니? 밥 굶게 생겼구나." 이 할아버지는 큰아들 완수에게 푸념처럼 말했다.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린 것도 잠시였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물려준 일을 내가 망가뜨려서는 안되지' 이 할아버지는 굶어 죽더라도 조상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돌려 먹었다. 그 뒤론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옹기 굽는 일에만 매달렸다. 앞만 보고 걸었다. 이튿날 이 할아버지는 큰아들을 불렀다. "내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이젠 네가 일을 다 맡도록 해라. 난 손이 떨려 더 이상 그릇을 빚기가 어렵구나." "진작 그렇게 하셨어야지요. 지금까지 해 오신 것만 해도 힘든 일이었지요. 저도 나이 43살이니 얼마든지 아버지 일을 하고도 남아요." 이 할어버지는 마음이 든든했다. 아들을 건너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옹기 그릇에는 과명단을 발라서는 안 된다. 요즘 사람들은 반짝거리고 예쁜 것만 좋아하는데, 그것은 광명단이란 약을 발라서 신식 가마에서 구워 낸 신식 옹기야." "예, 알아요, 아버지." "우리는 구식 가마를 지켜야 돼. 신식 옹기는 몸에 좋지 않아. 광명단 속에는 납 성분이 묻어 있어 음식을 담아 먹으면 납도 같이 먹는 셈이 되지."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더욱 정성을 쏟아 옹기를 구웠다. 이 할아버지는 마침내 90년에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이종각(78살) 할아버지는 장독대에 제각기 공손한 모습으로 엎 드려 있는 장독들을 보면 흐뭇하기만 하다. @ff 12. 갓 할머니 이 양태로 큰 집 사곡(사고) 늙은 부모 공양하곡(하고) 어린 동생 부양하곡 일가 방상(친척) 고적(부조떡)하곡 이웃 사춘(사촌) 부조하게(하자). 요 양태를 한저하여사(어서 해야) 쌀도 나곡(나고) 밥도 나컬(날걸). 고정생(92살) 할머니가 부르는 양태(갓챙) 노래의 구성진 가락이 온 동네에 울려 퍼진다. "갓이 할 때마다 불렀으니 70년도 넘게 불렀지?" 노래를 끝낸 고 할머니가 옆에서 양태 절기(엮기)를 배우고 있는 딸(장순자 씨, 49살)에게 말을 건넨다. "어머니가 양태를 만든 지가 71년 되었지요?" "그래, 8살 때부터 만들었으니 그쯤 되겠구나."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배웠다고 그랬지요?" "그래, 내가 태어난 제주시 도연동에서는 양태 절기가 성했지." 갓을 이루는 양태, 갓모자, 망건 가운데 가장 만들기 어려운 것이 양태다. 양태는 재료가 대나무인 만큼 이를 삶고 훑어서 실처럼 가는 대오리 만드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 할머니는 10년 전부터 막내딸에게 양태 만들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막내딸을 대오리 뽑기까지 배우고, 양태 절기를 하고 있으나 어머니에 비해서는 무척 서투르다. "할머니도 양태를 잘 만들었나요?" "그럼, 어머니도 양태 절기가 제일이셨지." 제주의 옛 여성은 8살이 되면 대부분 무슨 일이든 시작하게 된다. 고 할머니는 어머니를 따라 양태 만들기를 익혀 나갔다. "양태 노래도 할머니가 가르쳐 주셨어요?" "아암, 노래를 하면 힘도 덜 들고 지루한 것도 덜하다며 가르쳐 주셨지. 각의 챙에 해당하는 양태 만들기는 대나무 가지를 삶는 것에서부터 시작,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8살 때부터 이 작업을 시작한 고 할머니는 한 시간만 놀아도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단다. 일손이 좀 더뎌도 채근을 받았다고 한다. 양태는 마디 길이가 두 뼘 이상 되는 2~3년 된 분죽(대나무)을 재료로 쓴다. 이 대나무를 손가락 굵기의 절반 정도로 쪼개어 속은 버리고 겉만 추려 5시간 정도 가마솥에다 넣고 푹 삶는다. 삶은 대나무를 말려 두었다가 그날그날 쓸 만큼을 물에 담그어서 명주실보다 고운 가닥으로 하나하나 가르게 된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죽세공으로 꼽힌다. 이 대오리 만들기는 손톱과 칼을 많이 쓰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넓적한 가죽으로 만든 무릎장을 무릎에 대고 대나무를 칼로 긁어서 얇은 종잇장처럼 만든뒤 이를 가느다란 나무 섬유로 뽑아 낸다. "이것 봐라. 그 일을 하며 한눈 팔다 다친 자국이다." 고 할머니는 여러 번 손톱과 손가락을 베었다며 흉터를 딸에게 보여 주었다. 대오리 만들기가 끝나면 양태 절기에 들어간다. 대오리를 두가닥으로 새끼 꼬듯 돌리면서 엮는다. 이 ㄸ 살의 수효가 500가닥이면 고급이고, 300가닥 정도면 하품으로 친다. 고 할머니는 어머니의 성화 덕분에 10살이 넘으면서 이틀에 양태 한 개를 절어 내는 재빠른 솜씨를 익혔다. 15살이 지나면서 양태 잘 만들기로 소문나 특별 주문을 받기까지 했다. 다 만들어진 양태는 묽은 아교로 풀을 먹이는데, 이 때 아교가 구멍을 막아 버리면 쓸모가 없게 된다. 고 할머니는 19살에 결혼해 바닷가 마을인 삼양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양태 잘 만드는 아가씨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그 때는 바닷가에 나와 사는 게 소원이었지. 그 마을이 양태 만드는 본고장이었단다. 집집마다 양태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고 할머니는 양태 만들기로 집안을 도맡아 꾸려 나갔다. "내가 만든 양태는 잘 팔려 나갔지. 장에서도 누구 집에서 만든 것인지 다 알지. 내가 만든 건 바다 건너 충무에까지 팔려 갔어." 고 할먼니는 유난히 손가락이 길었다. 그리고 손이 재빨라 양태를 아주 촘촘히 잘 짤 수 있었다. "너희 아버지는 밭일을 하거나 산에 가 땔감을 해 오고, 나는 노상 양태만 만들었지. 밤이고 낮이고." "손가락이 아프지 않았어요?" "왜 안 아팠겠니. 몇 시간 양태를 절고 나면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었지. 그 때는 양태 노래를 부르며 쉬었지. 그러다 힘이 살아나면 또 엮고..." 고 할머니는 그래도 양태 만들던 때가 행복했고 즐거웠다. 이렇게 딸에게 가르치기만 하니 때로는 무척 심심했던 것이다. "그 때는 이 거미줄 같은 대오리가 눈에 잘도 보였어. 남들은 50살만 넘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야단들이었는데." 고 할머니는 70살이 넘도록 대오리를 날렵하게 절어 나갈 정도였으니 양태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양태판을 앞에 하고 앉으면, 그저 마음이 편안했어." 6.25 전까지는 양태가 많이 팔려 고 할머니가 집안을 꾸려 가기에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부터 서서히 양태 주문이 줄어들어 20여 년 전부터는 1년에 10개 안팎으로 주문이 들어올 뿐이었다. "양태 일거리가 없을 땐 밭일, 과수원일 등 막일을 닥치는 대로 해서 집안을 꾸려 왔지." 그래도 고 할머니는 틈틈이 양태를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 놓았단다. 고 할머니가 평생을 양태 만들기에 바치고, 우수한 양태를 만들고 있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80년 11월에 인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평생 양태를 만들었어도 고 할머니의 재산은 남의 땅에 지어 놓은 초가 한 채뿐이었다. "아무 욕심도 없어. 그러면 됐지. 이제 어머니에게 배운 양태 절기를 너에게 잘 가르치는 일말고는..." 고 할머니는 인간 문화재 생활 보조금을 받고 하느님이 보답을 주시는 것 같다고 얘기한다. 고 할머니는 15년 전부터 막내딸을 따라 교회도 열심히 다닌다. "어머니, 저는 언제 인간 문화재가 될까요?" "넌 나보다 빨리 될 거다. 열심히 만들고 있으니." 고 할머니의 막내딸도 82년 1월에 양태 기술을 이어받기로 하고 문화재 관리국에 등록을 했다. "요즘 텔레비젼에 배우들이 쓰고 나오는 갓은 모두 하품이야. 나는 척 보면 알지." "그냥 쓰는 흉내만 내는 거니까 그렇지요." "그래도 옳게 만든 걸 써야 좋은 갓이 자꾸 나오지." 고 할머니는 물건은 쓰든 쓰지 않든 정성들여 만들어야 한다고 늘 말한다. "가끔 텔레비전이나 영화 찍을 ㄸ 쓴다면서 양태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이 왔는데 안 만들어 ㅈ지. 품질이 낮은 양태를 만드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져서였지." 고 할머니는 이런 얘기를 통해서 딸에게 양태를 잘 만들도록 은근히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만하면 내가 양태를 만들어 온 얘기를 어지간히 다 했지?" 고 할머니는 딸에게 더 들려줄 얘기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밤에는 무슨 불을 켜 놓고 만들었어요?" "호롱불이지. 불이 어두워 바싹 다가앉아서 절었지. 요즘같이 밝은 전깃불이면 하루 저녁에 한 개는 더 만들었을거야." 고 할머니는 그 때 졸음이 와서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양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밤참도 해 먹었지. 고구마나 감자를 삶아 먹고 체해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단다." 고 할머니는 고생한 얘기를 다 하자면 한도 끝고 없다고 말했다. "너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양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내 소원이다." 딸의 손을 꼭 쥐어 주는 고 할머니의 손은 뼈만 앙상했다. @ff 13. 담뱃대에 조상의 입김을 "천황 폐하께 충성하는 길은 특공대에 입대하는 길밖에 없어. 이제 우리가 곧 승리할 테니 나가서 싸워야지. 곧 이겨 돌아올 수 있어." 일본 순사(일정 때, 경찰관의 최하 계급)는 추옥판 소년에게 지원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재촉했다. 16살의 추 소년에게 신풍 특공대에 지원해 가면 열 사람 중 여덟 이상은 죽는다는 것을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어서 도장 찍어. 뭘 망설이고 있어? 명예롭게 지원하는 거야." 일본 순사가 또 재촉했다. 부모는 옆에서 지켜 볼 뿐 말 할 수가 없었다. 서슬이 퍼런 일본 순사에게 잘못 말을 했다가는 끌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일본은 2차 대전이 고비에 이르러 싸움에서 패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온갖 발악을 하며 한국 청년들을 전쟁터로 밀어 넣고 있었다. 신풍 특공대라는 걸 조직해 한국 청년들을 앞장 세워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삼고 있었다. 구실은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고향 마을(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 고정리)의 청년은 다 끌려가고 없었다. 추 소년은 몸이 떨렸다. 겨우 손을 내밀어 특곡대 지원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잘 생각했어. 자네는 훌륭한 애국자야. 시험을 곧 칠 테니 준비하고 있어." 일본 순사는 횡허케 자리를 떴다. "시험 ㄸ 답을 모두 틀리게 쓰면 떨어져 특공대에 끌려가지 않은 테니, 그 때 그렇게 하자." 추 소년은 아버지의 말대로 할 작정이었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시험날이 되었다. '시험에 통과하면 특공대에 가게 되겠지. 아버니의 말대로 틀리게 써야겠다' 추 소년은 아는 문제도 일부러 틀리게 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주재소(요즘의 지서)로 끌려갔다. 끌려간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모두 시험에서 영점을 받았다. "야, 이 새끼들아. 너희 놈들은 까막눈이냐? 아니면 병신이냐? 이런 놈들은 그냥 두어선 안 돼." 한 일본 순사가 눈알을 희번덕이며 말을 내뱉자마자 주먹과 발길이 날아들었다.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퉁퉁 부어 올랐다. 구둣발에 챈 정강이에서는 피가 흘렀다. 추 소년은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겨우 일어나 밖에서 기다리던 아버지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죽일 놈들. 언젠가는 망할 게다. 암, 망해야지." 추 소년의 어머니가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하늘이 꺼져 내리는 듯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날벼락이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며칠 몸조리를 하고 출근을 했더니, 교장 선생이 학교를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주재소 순사가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고 하더군" 외아들로 태어난 추 소년은 재주가 있어 12살이 되면서 국민 학교 사환 자리를 얻어 4년 동안 근무해 왔다. 그 자리를 특공대 시험을 못 봤다는 이유로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에게 매달려 사정을 했으나, 일본 순사가 얘기한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추 소년은 울며 발길을 돌려 학교를 나왔다. 추 소년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집안은 몇몇 이웃으로부터 사상이 나쁘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추 소년은 일자리가 없어 노는 것도 괴로웠지만, 손가락질까지 받는 것은 더욱더 억울하고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럭저럭 2년이 흐른 뒤 청년이 된 추옥판은 어느 날 이웃 마을에서 담뱃대를 만드는 박상근 할아버지네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박 할아버지는 담뱃대 잘 만들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추 청년은 할아버지 곁에 쭈그리고 앉아 담뱃대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 저도 담뱃대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요?" "그래? 너 참 학교 사환도 그만두었지? 놀고 있으니 마침 잘 됐구나. 놀면 쓰겠니? 기술을 배워 둬야 먹고 산다." 할아버지는 반가워하면서 추 청년에게 담뱃대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는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오라고 했다. 추 청년의 부모도 기꺼이 허락했다. 박 할아버지가 만든 백동연 담뱃대는 보통 것이 쌀 5말, 특상품이면 한 가마를 받았다. 농촌에서 머슴살이 1년 새경(품삯)이 불과 쌀 몇 가마였으니 그 값어치가 대단한 것이다. 그런 돈벌이가 되는 기술을 배우겠다니, 그지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 열심히 배우거라." 추 청년의 아버지는 두말없이 허락했다. 그 날부터 박 할아버지는 추 청년의 선생이 되었다. 그 때가 해방되던 해 봄이었다. '일본 놈들에게 받은 고초를 이걸로라도 갚자. 조상들의 입김을 담뱃대에 담아야겠다' 추 청년은 긴 담뱃대를 물고 담배를 피우는 어른들의 의젓함을 좋아했다. 특히 일본 놈들 앞에서 기다란 담뱃대를 턱 물고 큰 기침을 하며 보란 듯이 연기를 뿜어 내는 어른들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추 청년은 이것이야말로 일본 놈들을 말없이 기죽이는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박 할아버지에게서 기술을 익혔다. 백동연 담뱃대는 일명 오동죽이라고도 한다. 오동죽은 금은 세공보다 더 까다로운 기술이어서 대단한 솜씨로 친다. 오동이란 구리에다 금을 합하여 까맣게 빛깔 낸 것을 말한다. 하얀 백동제 대롱과 물부리에다 오동을 오밀조밀 무늬를 놓아 붙이고 새겨 장식했다는 뜻에서 오동죽이라 일컫는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었다. 추 청년은 신이 났다. 조선 시대 풍속 화가인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거추장스러우리만치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술을 배우고 또 배웠다. 조상의 훌륭한 옛 솜씨를 잇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게다가 제법 돈벌이도 잘 됐다. 백동연의 담뱃대에 '복(복)'이나 '희(희)' 같은 글자를 도드라지게 새겨 넣는 기술도 익혔다. 얇은 은판과 구리판을 이용하여 태극 무늬나 쌍학 같은 것을 장식하는 법도 배웠다. 이것은 담뱃대를 멋이 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추 청년에게도 담뱃대 주문이 들어오고,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6.25가 터졌다.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했대요." "큰일났네. 피난 가야 되겠지요?" 온 마을과 장터가 술렁거렸다. 추 청년도 불안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담뱃대 만드는 일을 쉬지 않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이야 공산군인들 어떻게 할라고, 죄지은 일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스승인 박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추 청년은 한없이 슬펐다. "옥판아, 이건 내가 쓰던 연장이다. 네가 사용해라. 부디 성공하거라." 박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쓰던 연장을 몽땅 추 청년에게 물려주었다. 기술뿐 아니라 연장까지 대물림을 한 것이다. 추 청년은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멋진 담뱃대를 만드는 것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겼다. 전쟁이 끝나자, 추 청년은 임실군으로 옮겨 오수 마을 장터에 조그만 가게를 차렸다. 그러나 장사는 되지 않았다. 6.25가 끝나자 담뱃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장사도 해야겠구만." 추 청년은 밥은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장터에서 새우젓과 생선도 팔았다. 그래야 담뱃대도 만들 수 있었다. "큰일이야. 모두들 서양 것만 좋아하니. 제나라 멋을 모르니 딱한 일이지." 추 청년은 그러한 세상을 한탄하면서 늙어서도 담뱃대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구식 담뱃대는 이제 관광 상품 구실밖에 하지 못하지만 담뱃대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일손을 놓지 않았다. 담뱃대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조상 대대로 갈고 닦아 전해 내려온 솜씨를 이대로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추 할아버지는 오늘도 담뱃대 만드는 일손을 바쁘게 놀린다. @ff 14. 손가락 끝의 눈으로 엮는 대바구니 김만국(67살) 할아버지는 제주도 제1의 죽세 공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다.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와흘리에 사는 김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51년 동안 대바구니를 엮는 즐거움으로 살아 왔다. 김 할어버지는 비록 눈을 잃어버렸지만 마음의 눈을 지니고 있어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대바구니 짜기로 한평생을 지냈다. 김 할아버지가 4살 때였다. "엄마, 눈이 아파요." 김 소년은 눈이 자꾸 따끔따끔헤 일하는 어머니에게 가서 눈을 떠 보였다. "아니, 너 손으로 눈 비볐니?" 어머니는 김 소년의 눈을 보고 몹시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소년의 눈에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기 ㄸ문이다. "아니오." "그럼 눈에 뭐가 들어갔었니?" "아무것도 안 들어갔어요." "어디 보자" 어머니는 김 소년의 눈꺼풀을 뒤집어 살펴보았다. 핏발만 섰을 뿐 이상한 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이 아프니?" "자꾸 따끔따끔해요." "가만 있거라. 약 찾아올 테니." 어머니가 안약을 찾으러 건넌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뒤 하얀 색깔의 물이 든 조그마한 병을 가지고 왔다. "만국아, 안약 넣자." 김 소년은 어머니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어머니는 김 소년의 눈에다 병에 든 물약을 두 방울 떨어뜨렸다. 김 소년은 잠시 눈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밤이 되자 김 소년의 눈은 더욱 충혈되고, 통증이 심해졌다. 김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의원을 찾아가려 해도 10리도 더 떨어진 곳에 있어 밤중에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김 소년은 울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엄마, 아직 해가 안 떴어요?" 김 소년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있던 어머니를 부르며 물었다. "안 뜨긴? 벌써 떴는데." 어머니는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방이 왜 캄캄해요?" 김 소년은 이상했다. 해가 떴으면 벌써 방이 환해야 할텐데, 캄캄하기만 한 것이었다. "방문에 햇빛이 들었는데 캄캄하긴?" 어머니가 이상하다 싶어 방문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김 소년이 두손을 치켜들고 허우적거리며 방문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만국아..." "만국아, 너 왜 그러니?" "엄마, 어디 있어요?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어머니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틀림없이 눈에 이상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눈 앞이 캄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김 소년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의원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때가 늦었습니다." "그럼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단 말입니까?" "참 안됐습니다. 어제 넣은 안약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아버지,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김 소년은 그만 실명하고 만 것이다. 김 소년은 공부를 할 수도 일을 배울 수도 없었다. 나이는 자꾸 먹는데 놀고만 있는 게 너무 지루하고 답답했다. 김 소년은 16살이 되자 아버지를 졸랐다. "아버지, 저도 일하고 싶어요." "성하지도 않은 몸인데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든지 배우고 싶어요." "네가 배우기에 쉬운 일이 있을 것 같지 않구나." 김 소년의 아버지는 여기저기 아들이 하기에 알맞은 일을 알아보던 중 이웃으로부터 대바구니 엮는 걸 가르쳐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김 소년의 아버지도 잘 엮지는 못하지만, 대바구니를 짤 줄은 알고 있던 터라 잘 됐다 싶었다. 김 소년도 무척 좋아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대바구니를 엮기 시작했다. 김 소년은 톱으로 대를 자르는 법부터 익혔다. 그것은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 다음 배운 일은 대바구니를 엮는 데 쓰는 대나무 껍질을 대칼로 실처럼 가늘게 떠내는 일이었다. 그것을 대실이라고 한다. 대칼을 쥔 김 소년의 손을 아버지가 감싸 잡고 대 껍질을 가늘게 하나하나 떠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대실이 얼마나 가늘게 떠졌는지를 만져 보도록 했따. 한 달을 가르치니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두께나 너비가 고르게는 떠지지 않았으나 한 달 만에, 그것도 앞을 보지 못하면서 혼자 할 수 있게 된 것은 보통 빠른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제가 잘 하죠?" "그래, 참 빨리 배웠다. 네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려고 칭찬을 많이 해 주었다. 김 소년은 아버지의 칭찬에 힘을 얻어 더욱 열심히 배웠다. 대에 손을 찔리기도 하고 대칼에 손을 여러 번 베이기도 했다. 김 소년은 그래도 그 일이 재미있기만 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왜 진작 저렇게 좋아하는 일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후회를 했다. 김 소년은 일 년 만에 대바구니를 엮게 되었다. 결혼을 해 딸도 낳았다. 대바구니도 점점 잘 엮게 되어, 살림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엮어 놓은 대바구니는 아내가 장에 내다 팔았다. 장터에 소문이 쫙 퍼졌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대바구니를 귀신같이 엮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김 아저씨가 엮은 대바구니는 더 잘 팔렸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훨씬 꼼꼼하게 엮어 대바구니가 탄탄하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칭찬삼아 했다. 김 아저씨가 손끝의 감각만으로 촘촘하게 대바구니를 짜 내는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 사람 손가락 끝에는 눈이 달렸나 봐요." "글쎄,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보통 사람보다 대바구니를 훨씬 잘 엮으니..." 김 아저씨가 대칼 한 자루로 두 엄지손가락을 합한 만큼의 넓이인 대나무를 두께 1mm, 너비 1.5mm로 마치 기계에서 실을 자아내듯 정확히 떠내는 솜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이렇게 뽑은 대실을 가지고 빠른 손놀림으로 한 올의 실수도 없이 촘촘히 대바구니를 엮어 가는 모습을 보면 눈 뜨고 일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김만국 씨는 딸 넷을 고이 길러 모두 결혼시키고 나니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와 행복하게 살아가던 김 할아버지에게 불행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한동안 화학 섬유 제품에 밀려 대바구니가 잘 안 팔리던 일을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난 해 2월, 할머니가 교통 사고를 당해 숨진 것이었다. 김 할아버지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발 노릇을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정성껏 엮은 대바구니를 장에 내다 파는 수고를 아끼지 않던 아내였다. 김 할아버지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나를 먼저 데려갈 일이지. 이제는 정성을 다해 만든 대바구니도 제때에 팔아 줄 사람이 없어 김 할아버지는 안타깝다. 그러나 김 할아버지의 대바구니 엮는 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저는 빛 없이도 환히 볼 수 있는 손가락 끝 눈이 있습니다. 아무리 눈이 안 보여도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의 눈을 뜨면 손끝에 와 닿는 모든 것이 그림처럼 보여 못 할 것이 없습니다."라며 오늘도 대바구니를 촘촘히 엮어 간다. @ff 15. 이어지는 징소리 '아버지 위독 급귀향' 전보를 받아 든 오 청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버지가 몹시 편찮으시니, 서둘러 시골 집으로 내려오라는 내용이었기 ㄸ문이다. '전보를 칠 정도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오 청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신 아버지가 아닌가. 징과 함께 일생을 살아 온 아버지. 그래서 '징장인'아리는 칭호를 얻고 인간 문화재로 이름이 높으신 아버지였다. 오 청년은 늘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오 청년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 제발 살아 계세요' 오 청년은 속으로 수없이 빌었다.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에 닿았을 때는 어느덧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아버지!" 대문을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불렀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방문을 열고 우르르 뛰어나왔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 쉬는 걸로 봐서 금방이라도 운명하실 것 같았다. "아버지, 제가 왔어요. 규봉이가 왔어요. 눈 좀 뜨세요." 오 청년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울부짖었다.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아들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아버지, 규ㅂ이에요."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꼭 쥐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길로 아버지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오 청년은 섧게 섧게 울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서울의 직장으로 돌아 왔으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살아 계실 적에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서였다. "내가 죽고 나면 누가 징을 만들꼬. 요새 젊은이들은 도무지 이런 일에 관심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시고는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워했다. 아버지는 명절 때 삼형제가 모이면 자주 이런 말씀을 하였다. 아버지는 은근히 삼형제 중에 누군가가 징 만드는 일을 이어서 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삼형제 중 그 누구도, "제가 아버지 뒤를 이어 징을 만들지요." 하고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첫째, 둘째 형은 운수업과 의사로 일하고 있었고, 오 청년은 75년에 서울 보건 전문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의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청년은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죄를 지은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런 충격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다. 생활에 보탬이 되지도 않던 징을 즐겁게 만들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아버지처럼 나도 보람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만든 징을 치며, 은은히 울려 퍼지는 소리에 눈을 지그시 감곤 했었다. '그렇다. 그것이 행복이다. 자기가 만든 징에 대해 보람을 느낀 아버지는 행복한 생활을 했다' 오 청년은 며칠 밤을 이런 생각을 하며, 뜬 눈으로 지새우고 고민한 끝에 아버지가 하던 징 만들기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 오 청년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78년 10월, 서울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은 돌아온 오 청년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얻었는데 그걸 팽개치고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 청년은 온종일 놋쇠 뭉치를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들겨 징을 만들었다. 손으로 두들겨 만드는 징은 방짜징(품질이 좋은 놋쇠를 거푸집에 녹여 부은 다음, 다시 두들겨서 만든 징)으로 꽹과리와 더불어 농악에 없어서는 안 될 타악기다. 징은 오 청년이 마음먹은 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리가 탁하고 은은하지 못했다. 오 청년의 고향 옥산리는 지리산과 덕유산, 백운산의 세 골짜기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다. 때문에 이 함양 징은 전국 최고급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원래 징은 산수가 빼어나고 이름 있는 산의 세 골짜기의 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명품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함양이 좋은 징을 만들기에 지리적 조건이 딱 맞는 곳이다. 오 청년은 자신이 만든 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뜨리고 다시 만들었다. 그래도 소리가 은은한 징은 쉽사리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배워 둘걸' 하고 후회도 했다. 사실 아버지가 징을 만들 때는 옆에서 보기에 별로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놋쇠를 달구어서 적당히 두들겨 만들면 되는 걸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 청년은 징 만들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오 청년은 징을 만들어도 만들어도 뜻대로 되지 않났다. 제대로 소리를 내는 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가 버릴까 하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나는 영원히 패배하고 만다' 오 청년은 마음의 고삐를 죄었다. 그러기를 일 년. 마침내 제대로 소리를 내는 징을 말들어 냈다. 오 청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 기분이었다. 오 청년은 온몸에 힘이 새로이 솟는 것을 느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징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요즘 젊은이가 아니야. 다들 그런 일은 하기 싫다고 도시로 가 버리는데 고향에 돌아와 징을 만드니, 여간 기특하지가 않아." 마을 어른들은 하나같이 오 청년을 칭찬했다. 그럴 만도 했다. 징은 함양 지방의 전통적인 유기 제품이었지만 20개가 넘는 유기 제작 공장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청년이 징을 만들기 시작한 지 5년이 되자, 소문이 퍼져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왔다. 오 청년은 그제야 하루 8~10개의 징을 만드는 솜씨를 익히게 되었다. 마침내 끊어질 뻔했던 우리 악기인 방짜징의 그 은은한 소리가 오규봉 청년의 손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기계로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내지만, 주문을 받아 손으로 만드는 함양 징은 그 정성만큼이나 수명이 길고 소리가 은은하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야." 주문했던 징을 받아 가는 사람들이 징을 쳐 보고, 그 우렁차면서도 은은한 소리에 감탄해 한 마디씩 했다. 그들은 오 청년의 아버지가 인간 문화재로 함양뿐 아니라 전국에서 으뜸으로 꼽히던 '징장인'이었음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징을 찾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어 함양에서만도 20개가 넘던 징 등 유기를 만드는 제조 업체가 지금은 오직 오 청년의 방짜징점 하나만 남아 있다. 오 청년은 이럴 때 아버지라도 살아 계셨으면 아주 큰 힘이 될 텐데 하면서 아쉬워한다. 오 청년은 징 주문을 받으면 공장 안에서 휘파람이나 농담, 욕설 등은 아무도 못 하게 한다. 장인이면 당연히 그런 마음으로 정성껏 만들어야 하고, 그러한 나쁜 소리들이 혹시라도 징 소리에 배어들까 봐 걱정해서였다. 그만큼 깨끗한 마음으로 징을 만들어야 좋은 징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절에서 주문한 징을 만들 때는 스님이 공장 주위를 돌며 염불을 할 정도로 징 만드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다. 인간 문화재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징 만들기 13년, 38살이 된 오규봉 아저씨는 고향의 맑고도 우렁차며 은은한 징소리의 숨결을 잇기 위해 망치 소리와 함꼐 나날을 보낸다. 16. 목기 만들기를 자랑으로 삼아 "아버지, 우리도 목기 만드는 일 이제 그만두지요?" 김 청년은 목기를 다듬다 말고 느닷없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너, 금방 뭐라고 그랬니?" 아버지는 김 청년의 말을 정말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듣고도 어이없어서인지 되물었다. "목기 그만 만들면 좋겠다고요." "왜 그런 생각을 했니?" "팔리지도 않는데요, 뭐. 모두들 플라스틱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든 그릇을 쓰잖아요" 김 청년은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려고 애를 썼다. 목기 만들기를 일을 일 년 동안 배웠지만 너무나 어려웠다. 게다가 플라스틱과 알루미늄 그릇이 많이 나와 목기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김 청년은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려는 것이다. "네 말고 맞다. 그렇지만 기다리다 보면 잘 팔릴 날도 있을 게다." 아버지는 느긋했다. "목기 만드는 여러 집이 문을 닫았는데..." 김 청년은 아버지에게 손을 꼽아 보였다. "우리 '금호 공예'는 그런 집과 다르다. 너의 할아버지로부터 너까지 3대째가 아니니? 그게 일백 년이 넘었다. 그만큼 뿌리가 깊다. 너의 할아버지도 목기만 만들다가 고생도 많이 하셨다. 너도 지금까지 목기를 만들면서 온갖 궂은 일을 다 겪었다. 그런 걸 이제 화서 그만둘 수는 없다. 그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한 길을 가다 보면 빛 볼 날이 있을 게다." 아버지는 김 청년에게 차근차근 말을 했다. 김 청년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때 나이가 35살이었다. 전주 공업 고등 학교를 나와 군에 입대, 육군 대위로 오랫동안 복무했기 때문에 나이가 많았다. 김 청년이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목기 제조 기술 배우기를 권했다. "시골에서 조용히 목기나 만드는 것이 가장 편하다. 도시로 나가 봐야 일거리도 시원치 않고..." 아버지는 은근히 아들이 목기를 만들기 바랐다. 김 청년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와 함께 목기를 만들겠어요." 그래서 김 청년은 어려서 익힌 목기 제작 솜씨를 살리면서, 아버지에게 기술을 좀더 익히고 있었다. 김 청년의 고향인 남원은 예로부터 목기류 제작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지리산 주변이어서 은행나무, 오리나무, 저나무, 소태나무 등 목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 사찰 등에서 목기(나무 그릇)를 많이 쓴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목기류는 스님들의 밥그릇인 목바리를 비롯해 제사 그릇, 쟁반, 술병, 다과 그릇, 찬합 등 종류가 많다. 김 청년은 목기 만드는 일을 시작했으나 어릴 때 익혔던 나무의 초갈이와 재갈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초갈이는 나무를 그릇의 모양이 대강만 드러나도록 깎는 것이고, 재갈이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게 깎는 일을 말한다. 김 청년은 일 년이 걸려서야 이 일을 거의 배울 수 있었다. 그 다음엔 칼로 정교하게 다듬는 일이다. 손에 물집이 생기고, 손가락을 여러 번 베이기도 했다. 칼을 잡는 손가락엔 굳은 살이 생겼다. 온종일 칼질을 하고 나면 팔에 힘이 쭉 빠지고 온몸이 나른해져 왔다. 밤에는 헛소리를 할 정도로 피곤했다. 그러나 청년은 거쳐 가야 할 과정이라 생각하고 잘 견뎌 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목기에는 사포질을 한 다음 생옻칠을 하게 된다. 목기는 정밀한 공예술도 중요하지만, 옻칠이 매우 중요하다. 생옻칠은 나무에 잘 스며들어 색깔이 변하지 않고, 좀이 슬지 않게 한다. 또 냄새가 없어 오래 사용할 수 있다. 때문에 옻칠을 제대로 해서 만든 목기에는 음식물을 오래 담아 두어도 변하지 않는다. 옻칠은 아버지가 했지만, 김 청년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옻이 올라 온몸이 퉁퉁 부은 적도 몇 번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며 목기를 혼자서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는 40살이 넘어 있었다. 그 무렵엔 목기가 정말 잘 팔리지 않아 생활에도 어려움이 컸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김 아저씨 혼자서 목기 공장인 '금호 공예'를 이끌어 갔다. 생활이 쪼들리자 생각다 못한 김 아저씨는 직접 목기 팔기에 나섰다. 물건을 짊어지고 도시로 나가 행상을 시작했다 "목기 사요! 목기" "목기요! 남원 목기" 김 청년은 하루 장사를 하고 나니 목이 쉬었다. 다음 날은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안 팔리더라도 많이 만들어 차라리 창고에 쌓아 두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한 김 아저씨는 시골로 돌아와 버렸다. 그 때부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목기를 깎아 나갔다. 생활이 무척 어려웠지만 설날과 추석이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밤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주문이 밀려왔다. 그럴 때 돈을 좀 모았다가 생활을 꾸려 나갔다. 김 아저씨가 10여 년 목기 만드는 기술을 쌓았을 때였다. 1983년이었다. 전국 민예품 경진 대회에 목기를 출품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런 대회에는 쟁쟁한 사람들만 출품하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감히 얼굴을 내밀 수 있겠어요?" 김 아저씨는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런 말 말아요. 왜, 어때서요? 그래도 남원에서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솜씬데." 이웃 사람들이 정색을 했다. "그래도 그렇죠. 시골 사람이 무슨 솜씨가 있다고..." "아니, 배운 게 없나, 솜씨가 없나? 갖출 건 다 갖추었는데 쓸데없는 소리를 하네요." 그래서 김 아저씨는 용기를 내어 경진 대회에 출품해 보기로 했다. 며칠 밤을 새오다시피 해 출품작을 만들었다. 김 아저씨는 직접 들고 가서 대회에 출품했다. 그렇게 해놓고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주최한 곳으로부터 특상에 뽑혔다는 연락이 왔다. 온 마을 사람들이 축하해 주었다. 김 아저씨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목기 제작 기술에 있어서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목기를 만들어 온 보람을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김 아저씨는, '한 길을 걸으면 언젠가는 빛 볼 날이 있을 게다'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김 아저씨는 그 말의 참뜻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김 아저씨는 목기 제작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이젠 단순히 그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술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나무를 자르고, 깎고, 칼질을 한다. 20여 명의 문하생과 함께 목기를 제작하고 있는 김 아저씨에겐 딱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외동아들인 연수(20살) 군에게 목기 제작 기술을 전해 4대를 잇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가업이 끊길까 하는 걱정이다.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백일리 지리산 기슭에 자리잡은 '금호 공예', 그 곳에서 김 아저씨는 오늘도 목기 만들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FF 17. 나전 칠기의 예술인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초여름 바람이어서인지 선선했다. 송방웅 청년의 답답하던 가슴은 바닷바람으로 인해 조금 시원해졌다. 막상 집은 뛰쳐 나왔지만, 할 일이 없어 막막했다. '어떻게 하나... 다시 돌아갈까' 공부가 하고 싶어 가출은 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친구와 친척 집을 며칠 찾아 다니고 나니 갈 데도 없어졌다. 송 청년의 눈앞에 화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돌아가면 호된 꾸지람을 들을 것 같았다. 어둠을 헤치고 밀려온 파도가 송 청년 앞에 철썩철썩하는 소리를 실어다 놓고 물러갔다. 파도 소리가 마치 '돌아가, 돌아가' 하고 타이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정말 아버지가 하는 나전 칠기(광채가 나는 작은 자개 조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박아 붙여서 꾸민 공예품) 일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못한 것일까?' 송 청년은, 옛부터 나전 칠기의 고장으로 유명한 충무에서 나전 칠기의 명인으로 꼽히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17살이던 1917년부터 나전 칠기를 익혀, 전국에서도 이름이 나 있었다. 아버지가 충무 통영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송 청년을 불러 앉혔다. "대학에 보낼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겠니?" 아버지는 송 ㅊ년이 대학에 들어가는 걸 그만두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말했다. "대학에 가고 싶은데요. 어떻게 해서든 보내 주세요." 송 청년은 아버지를 졸랐다. "나도 많이 생각해 봤지만 어렵겠다. 나는 너를 대학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너보다 더하다. 그렇지만 어쩌겠니?" 아버지도 마음이 아팠다. "그럼, 전 고학을 해서라도 대학에 가겠어요." 송 청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너에게 그런 고생은 시키고 싶지 않다. 차라리 그 고생을 할 바에갸 내가 하는 일을 배워라. 장래에도 좋을 것이니." "싫어요. 배워도 대학을 나온 다음에 배울래요." "아니다. 일찍부터 배워야 성공한다. 잘 생각해 봐라." 송 ㅊ년은 며칠을 두고 생각했다. 대학 진학은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전 칠기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장남이니 가업을 잇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나도 이제 마음이 가볍구나." 아버지가 무척 반겼다. 맨 먼저 자개 뜨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개는 남해안에서 수집한 전복 껍데기로 뜬다. 그라인더(숫돌)를 사용해 두께가 0.1mm 이내가 되도록 아주 얇게 만든다. 아기가 첫걸음 배우기가 힘들듯이 처음 일이 무척 어려웠다. 자칫하면 자개가 부서지거나 금이 가기 일쑤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약간 흥미를 느껴 일도 재미가 있었으나,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일을 배운지 석 달이 되었다. 제법 조개를 뜰 줄 알게 되었을 때였다. 공부가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송 청년은 마침내 집을 나와 부산으로 왔던 것이다. 바닷가의 밤은 갚어 갔다. 바람도 추위를 느낄 만큼 싸늘해졌다. 갑자기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는 친구도 없고, 자기를 도와 줄 그 누구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전 칠기의 외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아버지도 외로울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도와 드려야겠다' 송 ㅊ년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돌아온 아들을 맞은 아버지는 무척 반가워했다. "돌아올 줄 알았다. 꼭 일주일 만이구나. 그 동안 고생은 안 했니?" 아버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집에서 놀다 왔어요. 이제부터 자갯일 열심히 하겠어요." 송 청년은 그 때부터 쉬지 않고 부지런히 자갯일을 하기 시작했다. 익히다 둔 자개 뜨기를 다시 배웠다. 마음을 다잡고 하니 재미있었다. 일 년이 지나 자개 뜨기가 어지간히 손에 익자 자개 붙이기를 배웠다. 우선 경대나 보석함 같은 작은 물건에 자개를 붙이는 일을 배웠다. 붙일 곳을 다듬은 뒤 아교를 사용해 일정한 모양으로 자른 자개를 놓아 가면서 나비나 난초 등 원하는 무늬로 붙이는 것이었다. 자개를 붙인 다음에는 지저분하게 붙어 있는 아교를 따뜻한 물로 ㄲ끗이 씻어 낸다. 그리고 옻칠을 4~10변 되풀이 해 광을 낸 뒤 쇠붙이 장식을 붙여 마무리 하게 된다. 모두 30여 단계의 일손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경대나 보석함 등 작은 것도 한 달 이상 걸려야 완성된다. 송 청년은 이것을 익히는 데도 일 년이 넘게 걸렸다. 다음엔 문갑과 장롱에 자개 붙이는 일을 시작했다. 송 ㅊ년이 힘들어하자 아버지는, "나전 칠기는 장사꾼이 하는 것이 아니야. 예인, 즉 예술인이 하는 것이지. 적어도 아교 세 말은 먹어야 예인이 된다."라며 아들이 힘을 내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기술자가 아닌 예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장롱 같은 대작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일 년 이상 결렸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은 더욱 꼼꼼하게 정성들여 만들어야 한다. 예술인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곁에서 늘 돈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며 장인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송 청년은 5년이 걸려서야 장롱 자개 붙이는 일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일을 해 더없이 알뜰하게 배웠다.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일하게 된 송 청년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본받아 상품으로 나전 칠기를 만들지 않고,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작품도 대접을 받게 되자 주문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주문 작품말고는 결코 상품을 내놓지 않았다. 경대나 보석함, 장롱, 문갑 등은 한 작품에 100만~1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었지만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예술인은 배가 불러지면 작품을 제대로 만들 수가 없으니 늘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가 79년 인간 문화재 제54호로 지정받은 것이다. 송 청년이 나전 칠기를 익힌 지 20년이 되던 해였다. 송 청년도 이미 39살의 장년이 되었다. 송 아저씨도 81년 전승 공예전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대통령상 등 30여 번이 넘게 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충무시 북신동의 송 아저씨 집 작업실은 부자 나전 칠기방으로 유명해졌다. 나전 칠기를 배우려는 젊은이도 찾아오고, 좋은 작품을 받아 가려는 상일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87년 송 아저씨의 아버지(송주안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송 할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부디 한 길을 가거라." 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송 아저씨는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처럼 자상하고 알뜰하게 가르칠 스승이었던 송 할아버지가 떠난 뒤로 무척이나 허전했다. 송 아저씨의 나이는 51살이다. 이제 2대째 국내 최고의 장인 소리를 들으면서 아버지가 남긴 조그만 집에서 나전 칠기 일을 쉬지 않고 한다. 아버지가 쓰던 작업실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어떤 큰 집에 사는 것도 부럽지 않고 편안한 마음에 젖는다고 한다. 게다가 대학에 다니는 맏아들이 스스로 3대 가업을 잇겠다면서 나전 칠기를 배우고 있어 송아저씨는 더 없이 흐뭇하다. 사라져 가는 전통 공예를 이을 후배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아들이 나전 칠기를 익히게 되어 한시름 덜었기 때문이다. @FF 18. 연아 올라라, 하늘 높이 올라라 정월 대보름 때라 바람이 세차고 싸늘했다. 그런데도 들판에는 연을 날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연날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연이 물고기처럼 퍼덕이며 꼬리를 치거나, 솔개처럼 아스라이 떠서 맴을 돌았다. 황해도 장연 땅. 우리 나라에서도 연날리기 고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수십 명의 연꾼들이 몰려들어 손수 만든 연을 자랑하며 한판 연싸움을 벌이고 있다. 거기에는 노유상 소년도 끼어 있었다. 유상 소년은 큰형이 날리는 나비연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연아 올라라, 하늘 높이 올라라." 연은 유상 소년의 응원가를 듣기라도 한 듯 하늘로 솟았다. "와, 잘 올라간다." 유상 소년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유상 소년의 맏형인 우상 소년은 나비연을 잘 날려 장연에서는 그 실력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국민 학교 졸업을 며칠 앞둔 13살의 유상 소년은 연날리기 대회가 끝나자 집에 돌아와 형을 졸랐다. "형, 나도 연 만드는 법 좀 가르쳐 줘." "넌 아직 잘 만들 수 없어." "아니야, 만들 수 있어. 한 번 가르쳐 줘 봐." 형은 하는 수 없이 동생에게 연 만들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벼우면서도 강한 참대나무를 쪼개어 가늘고 곱게 다듬은 뒤 살을 만들었다. 살에다 한지를 바르고, 연 이마에 곱게 색칠을 했다. 얼레도 새로 만들어 연줄을 가득 감았다. 유상 소년이 형과 함께 만든 연은 방패연과 가오리연이었다. 방패연은 연 한가운데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어, 연이 앞뒤, 왼쪽 오른쪽, 아래 위로 자유로이 난다. 가오리연은 꼬리가 가오리처럼 길게 달려 하늘로 오를 때 헤엄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만든 연을 가지고 두 형제는 들판으로 뛰어나갔다. 연은 하늘로 아주 잘 올랐다. 유상 소년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 뒤로 연 만들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다. 유상 소년은 붕어연, 범연 등을 만들어 날렸다. 연이 80여 종류나 된다는 것도 알았다. 유상 소년은 청년이 되면서 점점 연 만들기와 날리기에 전문가가 되어 갔다. 그러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부터 일본인들은 하늘 높이 연을 날리는 우리 겨울 민속 놀이를 한국인의 민족 혼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방해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연 머리에 붙은 태극 무늬는 우리 만족 정신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 일본 사람들의 검은 속을 꿰뚫어본 노 청년은 고집스럽게 연을 만들어 날렸다. "야, 날리지 말라는 연을 왜 자꾸만 날리는 거야?" 노 청년은 일본이 금지하는 연날리기를 하다가 마침내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 순사가 눈을 부릅떴다. "그냥 재미있어서 날렸어요." "재미있어서 날렸다고?" "예" "야, 이놈 봐라. 새빨간 거짓말을 하네." 일본 순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길이 날아들었다. "이놈, 혼 좀 내줘야겠어." 그 때부터 노 청년은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짓밟히고 채이고, 몽둥이로 얻어 맞았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다. 노 청년은 죽는 줄만 알았다. 다행히 아버지와 어머니, 형이 다시는 연을 날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빌어, 얼마 뒤 노 청년은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일본 놈들 꼴 보기 싫어 못 살겠구나. 이사해야겠다. 노 청년의 가족은 일본인을 피해 중국 북경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는 마음놓고 연을 날릴 수 있었다. 연도 만들 수 있었음을 물론이다. 노 청년은 연을 하늘 높이 띄웠다. 일본 놈들이 옆에서 봐주었으면 마음이 후련할 것 같았다. 마치 연을 따라 자신도 하늘 높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에 8.15 해방을 맞았다. 노 청년의 가족은 다시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연을 띄우는 기쁨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윷놀이, 제기차기, 널뛰기와 함께 설날에 하는 연날리기는 즐거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잠시였다. 6.25가 터진 것이었다. 노 청년은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했다. 장교로 6.25 전투에 참가했다가 휴전이 되자, 56년 12월에 예비역 중령으로 군을 물러났다. 이제 마음놓고 연을 만들고 날릴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민속 연날리기 대회가 열려 노 청년의 연 만드는 솜씨와 날리는 기술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종 연날리기 대회에 심사 위원으로 초대되고, 연 만들기 강습회에 강사로 초청되기도 했다. 노 청년은 연에 대한 강연회에 나가면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연의 유래에 대한 것이다. "지금부터 1300여 년 전, 신라 진덕 여왕 때 경주 반월성에 별이 떨어져 나라가 어지러워졌습니다. 이 때 김유신 장군이 밤중에 솜뭉치를 단 연에 불을 붙인 뒤 띄워 보냈습니다.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간 것처럼 백성에게 보여 안심을 시킨 것입니다."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고려말 최영 장군이 탐라(지금의 제주도)를 칠 때 산성과 산성 사이의 연락 방법으로 연을 이용했으며, 공격하기 힘든 성을 공격할 때 연에 솜뭉치를 단 뒤 불을 붙여 공격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임진 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섬과 섬 사이의 연락과 왜선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는 신호로도 썼습니다." 연 만들기를 60여 년. 할아버지가 된 노유상 선생의 손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히고 상처로 얼룩졌다. 노 할아버지는 어린이들 연 만들기 교실에 나가 연 만드는 방법도 가르쳤다. 연날리기 대회장에서는 날리는 기술을 가르쳤다. 많은 어린이들을 들로 불러내, 연을 띄우며 감기와 추위를 이겨 내도록 했다. 그 공로로 75년에 제19회 소파상을 받았다. 연날리기로 어린이들에게 푸른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노 할아버지는 미국, 캐나다, 일본 등 10여 개 나라에 20여 번이나 초청되어 연날리기 대회에도 참가, 한국 연의 뛰어남을 보여 주었다. 노 할아버지는 우리 연은 위 아래,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데, 외국 연은 높이만 올릴 수 있어 놀이감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한국 연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연 만들어 날리기에 평생을 바친 노유상(87살)할아버지는 가벼우면서도 탄탄하고 잘 나는 연을 70여 년 동안 만들어 이제 손에 연줄을 잡으면 높은 하늘의 공기 흐름까지도 알아 낼 수 있게 되었다. 70여 년 동안 1만여 개의 연을 만들어 '연 할아버지'로 불리는 노유상 할아버지는 마음이 든든하다. 맏아들 성규(35살) 씨와 둘째 아들 성도(33살) 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1년에 500여 개의 연을 만드는 노 할아버지는 서을시 서대문구 연희 2동 182번지 집에서 연을 만들며 마음을 하늘 높이 띄운다. 노 할아버지가 사는 동네마저도 연 할아버지 동네로 불릴만큼 노 할아버지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노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연을 만들고 날리며 생활해 오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지난 79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국제 연날리기 대회에서 각나라의 연줄을 30개나 끊어 버린 것이란다. 노 할아버지가 바라는 것 한 가지는 연날리기와 만들기에서도 인간 문화재가 지정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FF 19. 국악기에 우리 가락의 멋을 "아버지, 저도 악기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아버지는 아들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해 주기를 속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너는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외아들인데..." "네 얘기를 듣고 보니 그 말이 맞구나. 내 뒤를 이어 악기를 만들겠단 말이지?" 아버지는 퍽 반가웠다. 그러나 아들이 악기 만들기를 쉽게 생각할까 봐 겉으로 크게 나타내지 않았다. 이제 악기를 만들어 봐야 나이 때문에 별로 오래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누구에겐가 악기 만드는 기술을 물려주려던 참이엇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악기를 만들겠다고 나섰으나,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악기 만들기로 40년 가까이 한 길을 걸어온 이영수(65살) 할아버지는 외로움이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함께 일할 사람으로 아들(이동윤 씨)이 스스로 나섰으니, 마음 든든하고 흐뭇했다. "아버지 솜씨를 이어받아 그것을 빛내는 것도 뜻있는 일아라고 느껴지는데요." "허허,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보려무나. 네가 좋아하는 일이니." 이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악기 만드는 법을 대물림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았다. 우리의 악기인 거문고와 가야금, 비파 등 전통 현악기를 빠짐없이 다 만들고 있는 이영수 할아버지는 40년 가까운 세월을 우리 가락에 실린 멋과 흥에 이끌려 살아 왔다. 살아 있는 악기장들 가운데 악기 만드는 기술이 가장 뛰어난 이 할아버지의 지나간 시절은 험한 가시밭길이었다. 이 할아버지는 1926년에 인천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 할아버지는 아버지, 어머니 대신 생활을 꾸려 가야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괴롭고 힘들어도 동생들을 위해서 참고 또 참았다. 어려움을 힘겹게 헤치며 생활하던 중에 당시 제일의 악기장이었던 김붕기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은 이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김붕기 할아버지는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에서 태어나 타고난 손재주로 악기 만들기에서 뜻을 이룬 사람이었다. 이 할아버지는 김붕기 할아버지의 제자가 되었다. 그 때가 54년으로 이 할아버지의 나이가 27살이었다. 이 청년은 악기 만들기만이 자기의 살 길이라고 믿고, 스승인 김붕기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악기를 만들었다. 이 청년은 가야금 만들기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가야금을 만들 때 앞 통판은 오동나무를 쓰고 뒤판은 밤나무를 쓰지. 가야금 줄을 받치는 안족(기러기발)은 단단한 배나무를 쓰네." 스승의 설명을 이 청년은 한 마디도 빼놓지 않았다. "가야금은 옛날 가야국의 가실왕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지. 그 때나 지금이나 제조법은 똑같지." 이 청년은 스스으이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듣는 것마다 새로웠다. "오동나무는 30년 이상 자라야 하고, 평지에서 매끈하게 큰 것보다는 돌산이나 산비탈에서 비바람 눈보라에 시달려 옹이와 결이 화려해야 신비한 소리를 낸다고 하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가야금이 그래서 뛰어난 악기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청년은 가야금에 대해 스승으로부터 이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드는 법을 익혔다. 가야금 만드는 순서도 복잡했다. 먼저 잘 건조시킨 오동나무를 도끼 비슷한 자귀로 윗부분은 깎아 내고 밑부분은 홈을 파서 울림통을 만든다. 또 밑판은 20년 이상 된 밤나무를 사용하는데 울림통과 똑같은 크기로 만들어 접착력이 강한 풀로 붙인다. 만드는 과정은 대강 이렇지만 가야금 1개를 만드는 데는 3개월이 걸린다. 이 청년은 김붕기 스승 아래서 62년까지 가야금을 비롯해 거문고, 비파 등 전통 현악기를 만드는 알짜 기술을 이어받았다. 그 때 나이가 34살이었다. 마침 4년 뒤에 서울 시립 국악 관현악단이 생겼다. 이 아저씨는 스승의 소개로 관형악단의 악공으로 초청되어 일하게 됐다. 그런데 2년 뒤 새로운 삶을 이끌어 주었던 스승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님, 좀더 가르침을 주시고 떠나셔야지요. 이렇게 일찍 훌쩍 가시다니요." 이 아저씨는 스승의 주검 앞에서 한없이 울었다. 오직 삶의 기둥이었는데... 이 아저씨는 온몸에 기운이 쑥 빠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허전함이었다. '이재 내가 할 일은 더욱 정성들여 악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스승의 이름을 빛내고, 내가 사는 길이다' 이 아저씨는 굳게 결심을 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72년에 국악 고등 학교가 새로 생겨 문을 열자 그리로 옮겨 일했다. 이 아저씨가 좋은 악기를 만든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졌다. 그럴수록 이 아저씨는 온 힘을 쏟아 악기를 만들었다. 그것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길이었다. 스스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8년의 세월이 흘러, 이 아저씨는 53살의 나이로 국악 고등 학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지금부터다. 다른 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마음껏 악기를 만들어 보자. 한국의 멋과 흥이 남김없이 표현되는 이름 높은 악기를 만들자.' 이 아저씨는 그 뒤로 오로지 자신의 집에 차려 놓은 공방에서 악기 만들기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제자를 길러 내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아저씨가 61살 되던 어느 날이었다. "편지요." 우편 배달원이 대문 안으로 편지 한 통을 던져 주었다. 문화 공보부(지금의 문화부)에서 온 편지였다. 이 할아버지는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뜯었다. 편지 내용을 읽는 이 할아버지의 가슴은 마치 소년처럼 설레었다. 이 할아버지를 인간 문화재 42호 악기장으로 지정하니, 증서를 받으러 오라는 통지서였다. 이 할아버지는 기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평생 한 길을 걸어온 데 대한 인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쉬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 내며 살아가겠습니다. 이것은 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국악의 발전에 조그만 밑거름이 되고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인간 문화재 증서 수여식장에서 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수여식장에서는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할아버지는 오늘도 아들과 함께 만든 가야금을 어루만지며 음을 고르느라 어둠이 뜰에 잦아드는 줄도 모르고 있다. @FF 20. 밤낮 명주를 짰지요.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아주 오래 된 베틀에 앉아 비단 옷감인 명주를 짜고 있다. 젊은 사람 못지않게 손놀림이 빠르다. 몸은 약해 보이지만 명주 짜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할머니는 베틀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한 번 베틀에 앉아 명주를 짜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일을 한다. 할머니가 베틀에서 일어날 때면 곱고 보드라운 하얀 명주가 몇 자나 짜여 걸려 있다. 이 할머니가 최초로 명주 짜기 인간 문화재 87호로 지정된 조옥이(71살) 할머니다. 지난 88년에 인간 문화재로 지정되어 증서 수여식에 참석하라는 통지서를 받고도 조 할머니는 "그거 받는 것보다 명주를 하루 더 짜는 게 중요해요."라며 온종일 명주만 짰다. "할머니, 좋으시겠어요." 마을 사람들이 인간 문화재로 지정된 걸 축하하자, "내가 꼭 15대째 명주를 짜고 있는데, 그게 다 조상 덕이지요. 내가 잘 한 탓은 아니지요."라며 조상에게 공을 돌렸다. 조 할머니 집안의 명주 짜기 전통은 15대에 걸쳐 이어져 이름이 높다. 게다가 베틀로 명주를 짜는 집안은 조 할머니 집안밖에 없다. 조 할머니 집안의 명주 짜기 전통은 5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15세기 중엽 조선 시대 단종 임금때인 1450년께부터 조 할머니 집안의 명주 짜기가 시작된 것이다. 조 할머니 집안의 명주는 하도 유명해 왕실에 올리는 진상품으로 지정될 정도였다. 그러니 조 할머니가 인간 문화재로 지정된 공을 조상에게 돌리는 것도 당연하다. 조 할머니의 명주 짜기 솜씨는 540여 년 전부터 이어받은 셈이다. 조 할머니가 명주 짜기를 익히기 시작한 것이 열 살이 되면서부터 61년 동안 명주 짜기를 해 온 것이다. 평생을 명주 짜기에 바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조 할머니의 고향은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운산리이다. 성주는 본래 명주의 고장이었다. 대대로 명주를 짜 온 조 할머니네 집안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명주를 짠다. 조 할머니는 어려서 명주를 짜는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도 배우고, 어깨너머로 명주 짜는 것도 눈여겨보았다. 어머니가 힘이 들어 베틀에서 내려오면 조 소녀가 대신 앉아 명주를 짜곤 했다. 이렇게 틈틈이 익힌 명주 짜는 솜씨는 조 소녀가 결혼할 무렵에는 혼자서도 명주를 짤 수 있을 만큼 되었다. 조 소녀는 16살에 결혼해 이웃 마을인 본리동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조 아주머니의 시댁도 명주를 짜는 집이었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맏동서도 명주를 짜고 있었다. "아가야, 명주 짤 줄 아느냐?" 시할머니가 조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예, 어머님에게서 조금 배웠습니다." 조 아주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햇다. "그래? 일찍 잘 배웠구나. 나하고 오늘 명주 한번 짜 보자." "예" 조 아주머니는 대답을 했지만, 가슴이 떨렸다. 시할머니도 거의 평생 명주를 짜 왔기 때문에 어지간해서 솜씨를 인정받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 아주머니는 베틀에 올라앉았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마음을 가다듬어 친정 어머니에게서 배운 대로 명주를 짜기 시작했다. 시할머니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됐다. 그만 짜거라." 조 아주머니가 베틀에서 내려오자 시할머니는 "꼼꼼히 배웠구나. 조금만 더 배우면 아주 잘 짜겠구나."라며 칭찬을 해 주었다. 조 아주머니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조 아주머니는 친정 어머니에게 마음으로 감사를 했다. 조 아주머니는 다음 날부터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맏동서로부터 명주 짜기를 더 배우게 되었다. 잘 짜지만, 아직 서툰 데가 있어서였다. 조 아주머니는 얼마 더 배우지 않아 명주를 잘 짜게 되었다. "나이도 어린데 글쎄 명주를 어른처럼 잘 짠대요." "누가 아니래요." "며느리 하나는 잘 봤지." "명주 짜는 집에 딱 맞는 며느리지." 마을 사람들도 하나같이 조 아주머니를 칭찬했다. 또 좋은 며느리 본 것을 부러워했다. 막상 명주를 많이 짜게 되니, 배우던 때와는 달리 무척 힘들었다. 온종일 베틀에 앉아 있노라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팔다리 아픈 것은 거기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늦은 밤이면 졸음을 견딜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새벽까지도 짤 때가 있었다. "그만 자거라. 그러다 몸살나겠다." 시어머니가 밤늦게까지 명주를 짜는 며느리를 보고 걱정을 해 주었다. "괜찮아요, 조금만 더 짜면 끝맺음을 할 수 있는데요." "그래도 그렇지. 밤이 너무 늦었다." "제 걱정 마시고 어머님 먼저 주무세요. 곧 자러 가겠어요." 조 아주머니는 이처럼 부지런하고, 일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일을 깔끔하게 해냈다. 조 아주머니의 명주 짜는 솜씨는 이제 마을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조 아주머니네는 봄, 가을에 명주를 6필이나 짰다. 1필이 40자니까 240자를 짠 것이다. 그래서 마을에서 명주 부자로 불렸다. 조 아주머니네가 짠 명주는 다른 집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양도 많았지만, 명주 결도 무척 고와서 장사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쉬지 않고 명주를 짜 내어 60년대 이후 화학 섬유가 많이 나돌아도 조 아주머니네 만은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화학 섬유가 많이 나오자, 명주 짜기를 그만두는 집들이 늘어났다. 조 아주머니네는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온 집안 전통에 따라 명주 짜기를 계속했다. 오히려 조 아주머니의 명주 짜는 솜씨는 더욱 좋아져서 활기를 띨 정도였다.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뽑은 아주 가느다란 실로 짜는 것이라 좀처럼 불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명주 짜기는 먼저 참고 견디는 마음이 굳어야 한다. 조 아주머니는 명주 짜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명주 짜기로 50년의 세월이 흘어 할머니가 된 조옥이 씨는 86년에 전승 공예 대전에 명주를 출품했다.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내 본 것이었다. 성주의 명예가 걸린 것이기도 했다. 마침내 발표가 되었다. 장려상에 뽑혔다. 전국 대회에서 입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을 받은 뒤부터 '명주 할머니'로 불리게 된 조 할머니는 조카와 손녀들에게도 명주 짜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명주 짜기가 16대째로 이어진 것이다. 조 할머니는 지금도 나무로 만든 베틀을 방안에 들여놓고 혼자서 명주를 짜고 있다. 본리동 마을은 조 할머니로 인해 명주의 고장으로 이름을 이어 가고 있다. @FF 21. 기와집 지붕만 보면 즐겁지요 한형준(62살) 할아버지는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참 오랜만에 기차를 타 보는 것이었다. 이번 서울행은 정말 뜻깊고 흐뭇한 것이어서 한 할아버지는 마음이 가벼웠다. 주머니에서 다시 한 번 통지서를 꺼내 읽어 보았다. 문화 공보부에서 온 통지서였다. 인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증서 수여식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한 할아버지는 기와 만들기에 평생을 바쳐 온 제와장이다. 한 할아버지는 우리의 기와집 지붕에 쓰이는 전통 기와를 19살 때부터 43년 동안 구워 오고 있다. 전통 기와를 굽는 제와장은 우리 나라에서 한 할아버지 한 사람밖에 없다. 나라에서는 전통 기와의 맥을 잇기 위해 한 할아버지를 중요 무형 문화재인 인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한 할아버지는 차창 밖으로 기와집만 보이면 놓치지 않고 살펴보았다.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전통 기와집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가 기계로 만든 기와로 이은 현대식 기와집이었다. 한 할아버지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모두들 왜 서양식만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숨도 그런 뜻이 담긴 것이었다.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기와집이 거의 보이지 않아 한 할아버지는 무언가 허전해지고 섭섭해지기까지 했다. 인간 문화재 증서 수여식장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여러 사람이 증서를 받는 모양이었다. 한 할아버지가 증서를 받을 차례가 되었다. "인간 문화재 제91호 한형준. 위 사람은 우리의 전통 기와를..." 증서를 받자 박수가 쏟아졌다. 한 할아버지는 감회가 새로웠다. 옛날에는 기와 굽는 것을 천하게 여겼었다. 한 할아버지는 그래도 말없이 기와를 만들어 왔다. 생활의 어려움도 무릅쓰고 기와 굽기에 매달렸던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한 할아버지는 오늘의 영광이 있도록 잘 가르쳐 준 스승의 가르침이 새삼스레 고맙게 느껴졌다. 한 할아버지의 스승은 고윤석 할아버지였다. 두 달 전이었다. 함께 기와를 굽던 고 할아버지가 갑자기, "아이고,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하며 머리를 만졌다. "많이 아프십니까?" 한 할아버지가 물었다. "괜찮아지겠지." 그러나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핏기가 가시고, 눈을 감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정신 차리세요." 한 할아버지는 스승을 흔들며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손목의 맥박을 짚어 보았으나 맥박도 멎어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것이었다. 고혈압이었다. "이렇게 훌쩍 떠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저 혼자서 어떻게 해 나갑니까?" 한 할아버지는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언젠가 스승이 한 할아버지에게 "만약 내가 죽거든 자네가 꼭 이 기와 가마를 맡아 주게."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돌아가시긴 왜 돌아가세요." 한 할아버지는 스승이 그냥 농담삼아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웃어넘겼다. 막상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스승의 장례식을 치른 한 할아버지는 스승이 차린 '안양 제와막(기와 공장 이름)'의 주인이 되었다. 기와 공장의 주인이 된 것이다. 고윤석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기와 공장뿐 아니라 한 할아버지까지도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전통 기와 공장과 제와장이 된 것이다. 한 할아버지는 스승에게 기와 만들기를 배우면서 꾸지람도 여러 번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것이 오늘날 자기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느꼈다. 한 할아버지는 스승으로부터 기와 만들기를 배우던 때가 눈앞에 떠올랐다. 기와를 만드는 데 쓰는 찰흙을 이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온종일 흙을 발로 밟아야 했다. 나중에는 다리에 힘이 빠져 흙 속에서 발을 빼 올리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겨진 흙을 다시 차지고 질기도록 만들기 위해 커다란 나무 망치로 흙덩이를 내려쳐 짓이기는 메질을 했다. 찰흙인데다 메질을 하면 흙이 차져서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팔이 아파 나무 망치를 치켜들 힘도 없었다. 스승은 그런 일을 오히려 제자보다 더 잘 해냈다. "젊은 사람이 왜 그리 힘이 없어?"하고 제자를 은근히 나무랐다. 한 할아버지는 그 때 19살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기와를 굽기 위해 반죽된 흙을 기와 모양으로 만들 때에도 잘못 잘라 꾸중도 들었다. 가마에 불을 잘못 때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정말 기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기 쉽고 편리한 현대식 기와 공장으로 옮겨갈 때 저는 제와장을 하늘이 내려 준 직업으로 알고 스승과 함께 일해 왔습니다. 앞으로 더욱 우수한 전통 기와를 만들도록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한 할아버지는 인간 문화재로 지정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 조상의 솜씨와 얼을 잇기 위해 힘써 온 데 대한 격려의 박수였다. 증서 수여식이 끝나자, "할아버지, 저와 잠깐 이야기 좀 나눕시다." 한 젊은이가 한 할아버지 곁으로 뛰어와 말했다. 신문 기자였다.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었다. "시골 사람이 뭐 말을 할 줄 알아야지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40여 년 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 오셨는데..." 기자도 한 할아버지를 퍽 존경하는 눈빛이었다. "우리 전통 기와의 좋은 점은 무엇입니까?" "전통 기와는 겉 모양은 투박하고 예쁘지 않으나 더위, 추위, 눈, 비에 강합니다. 기계로 만든 요즘 기와는 3년만 사용하면 얼어 터지거나 아니면 저절로 금이 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통 기와는 35년을 넘게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전통 기와가 대단히 좋군요." 기자가 감탄했다. "그렇다마다요." 한 할아버지는 기분이 썩 좋았다. "전통 기와를 만드는 과정은 어떻습니까?" "요즘 기와는 모래 등을 부수는 분쇄기와 누르는 압축리를 써서 간단하고 쉽게 한꺼번에 많이 만들지요. 그러나 전통 기와는 20번 이상 손질을 합니다." "어떻게 손질을 합니까?" "먼저 찰흙을 밟아 메질을 하지요. 그 다음에 돌이나 지푸라기 같은 나쁜 것을 없애기 위해 쇠스랑칼이나 삼줄 등으로 이긴 찰흙을 0.4mm 정도로 아주 얇게 잘라 내는 일을 6번 이상하지요." "기와를 구울 때는 어느 정도 열을 가합니까?" "나무로 불을 때서 1,800~2,000도의 온도를 유지해 주지요. 그리고 가마 속에 남아 있는 불씨에 의해 오래 뜸이 듭니다." "할아버지의 기와 가마는 현대식 가마와 무엇이 다릅니까?" "현대식 가마는 대부분 기름으로 불을 때지만, 우리 옛날식 가마는 고래 가마라고 하지요. 즉, 풍로 가마형으로 나무로 불을 땝니다. 그래서 내가 만든 기와는 은흑빛의 고운 빛을 내고, 날이 갈수록 말끔하고 윤기가 나지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한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했다. 지금까지의 고되었던 마음이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 한 할아버지는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모령리 '안양 제와막'에서 기와 굽는 일손을 쉬지 않고 있다. @FF 22. 장롱 무늬 쇠붙이는 내 손이 가야 "똑딱 똑딱, 쏴악 쏴악, 똑똑 똑똑..." 경상남도 충무시 한산도를 등진 동네인 명정동의 한 집 안에서 쇠붙이를 두들기고 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 온다. 장롱에 붙이는 쇠붙이다. 그 쇠붙이를 한 할아버지가 쉴 새 없이 두들기고 간다. 쉬지 않고 일하는 주인공은 김덕룡(76살) 할아버지이다. 장롱 같은 나무 가구에 붙이는 쇠붙이인 장식을 60여 년 동안 만들어와 장식 만들기의 제1인자로 꼽힌다. 게다가 인간 문화재(두석장) 제64호로 지정받아, 그야말로 예쁜 장롱 무늬 쇠붙이는 김 할아버지 손길이 가야 빛을 발한다. 김 할아버지 집안 장식 만들기로 이미 이름나 있었다. 조상들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장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할아버지 때부터였다. 장식 만드는 기술은 다시 김 할아버지의 아버지에게로 이어졌다. 그리고 김 할아버지가 외곬로 60여 년을 만들어 온 장식 제조 기술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보통 학교(지금의 국민 학교)때부터이다. "덕룡아, 너도 장식 만들어 보고 싶지?" 아버지가, 옆에서 장식 만드는 걸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아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버지, 재미는 있어 보이는데 힘들 것 같아요." "그리 어렵지 않다. 너도 배우면 쉽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저도 배우겠어요." 김 소년은 얼른 장식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배우다가 어렵다고 그만두려거든 처음부터 나서지 말거라." 아버지는 김 소년이 열심히 배우도록 다짐을 받아 두려는 것이었다. "끝까지 아버지를 따라 배우겠어요." "그럼 됐다." 이튿날부터 김 소년은 아버지 곁에서 장식 만들기를 배워나갔다. 김 소년이 만드는 장롱 무늬쇠붙이는 장식 중에서도 전통이 있는 것으로 가장 값지고 인기있는, 단단하면서도 하얀 백통 장식이었다. 백통 장식은 주석 80p에 니켈 20p를 작은 용광로에 넣어서 녹여 끓인 쇳물을 철판에 쏟아 굳힌 뒤 톱과 망치, 줄등으로 자르고 두들기고 쓸어서 만든다. 모양은 나비나 황새 등 갖가지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식을 장롱에 붙여 놓으면 마치 방 안에 나비나 황새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덕룡아, 이건 무슨 나비 무늬지?" "..." 아버지가 나비 무늬의 장식을 만들다 김 소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아버지가 옆을 보니 아들이 졸고 있었다. "야, 이놈아!" "예?" 김 소년은 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내가 뭐라고 그랬지?" "..." 조느라 듣지 못했으니 대답을 못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도 정신 차려서 배워야 한다. 지극한 정성이 스미지 않으면 아름다움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단다." 김 소년은 그 뒤로 밤늦게 짱식을 만들어도 졸지 않았다. 김 소년은 쇠를 두들기다가 잘못해 손을 다친 적도 여러번 있었다. 장식을 만드는 데는 망치, 톱, 집게, 칼, 구멍 뚫는 비빕, 불매, 쇠철판 등 무려 200여 가지의 연장이 쓰인다. 김 소년은 어려움을 참고 견뎌 마침내 5년 만에 혼자 힘으로 장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장식은 잘 팔렸다. "뭐니뭐니 해도 김덕룡 부자가 만든 백통 장식이 최고야." "아무렴. 무늬도 좋고 색깔도 마음에 쏙 들지." 소문은 널리 퍼졌다. 정성들여 만든 물건은 반드시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김 소년과 아버지가 만든 장식은 꽤나 비싸게 팔렸다. 1고리(장롱 2짝감)가 쌀 10가마 값과 맞먹어 3~4고리만 팔면 1년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생활도 남부럽지 않게 했다.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김덕룡 소년도 30살의 청년이 되었다. 일제의 침략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밥그릇이고 숟가락이고 다 내놓아요. 세숫대야도 내놓고." 일본 놈들이 무기를 만든다며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거두어 갔다. 심지어는 솥까지 빼앗아 가려고 했다. "아버지, 어떻게 하면 좋지요? 장식을 만들 수 없으니 잘못하다간 굶어 죽겠어요." 김 청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버지 쪽을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글쎄 말이다. 쇠붙이로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못 하도록 하니..." 아버지도 답답하기만 했다. 땅을 파고 쇠붙이를 숨겨 둘 수는 있었다. 그러나 두들기는 소리를 낼 수 없어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에 몰래 일을 했다. 답답하고도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장식을 사러 오는 사람의 발걸음도 뚝 끊어졌다. 장식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세가 기울었다. 끼니조차 잇기 힘들 정도였다. 김 청년은 기가 막혔다. 자신이야 좀 굶는다 하더라도 견딜 수 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찌한단 말인가. 하는 수 없이 깻묵과 나무 껍질, 칡뿌리로 끼니를 이어 나갔다. 마침내 일본이 항복을 햇다. 나라는 독립이 되었으나, 어지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식일은 마음놓고 할 수 있었으나, 팔리지가 않았다. 그 때부터 장식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햇다. 양복장, 이불장이 모두 장식이 붙지 않는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장식도 스테인리스로 바뀌었다. 10여 개나 되던 장식 공장이 대부분 문을 닫고 2~3개의 공장이 겨우 장식의 맥을 이어 가게 되었다. 그것도 스테인리스 장식을 만드는 공장으로 변했다. 우리 전통 백통 장식을 만들어 내는 집은 오직 김 아저씨네뿐이었다. 김 아저씨는 이제 장식 만들기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며칠을 두고 생각했다. 아버지 회갑을 지내고 김 아저씨는 의논을 했다. "아버지, 이젠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어요. 집안을 꾸려 갈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어쩌겠니? 지금까지도 잘 버티어 왔는데 이제와서 그만둘 수야 없지 않니?" "언제까지 견딜 수 있겠어요?" "그거야 애비나 나나 알 수 없는 일이지."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 뭐라고 말을 하기엔 생활이 딱했기 때문이다. 한참 후에야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은 다 이해가 된다만, 대대로 내려온 가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조상을 저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생각해 보아라." 김 아저씨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조상에게 부끄러운 일을 할 수야 없지 않은가. 김 아저씨는 망치를 고쳐 쥐고 톱과 줄을 쓰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백통 장식 만드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외국의 문물에 취했던 사람들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조상의 손ㄸ가 묻은 옛것을 찾는 사람도 불어났다. 장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조상의 얼이 스민 장롱을 찾고, 무늬쇠붙이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서 김 할아버지의 일손은 바빠졌다. 김 할아버지는 한 길을 걸어온 보람에 힘든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다. @FF 23. 잊혀진 쪽물 들이기를 되살려 전라남도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 명하 부락에는 잊혀진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쪽물(남빛) 염색법을 새로이 알아 내 이어 가고 있는 윤병운(70살) 할아버지가 있다.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쪽물 염색법을 배운 윤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삼베와 무명 옷감에 물들이는 일을 열심히 했다. 일거리가 많아 아버지와 온종일 물들이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6.25가 일어난 뒤 나일론과 화학 섬유가 널리 퍼지면서 일감이 없어져 버렸다. "병운아, 쪽물일 그만 하고 농사나 짓자." 아버지가 먼저 쪽물 들이는 일에서 손을 놓았다. 병운 청년도 아버지를 따라 물들이는 일을 그만두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농사짓기에 나섰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한 덕에 농토를 많이 마련했다. 농토가 40마지기나 되어 부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윤 아저씨는 늘 마음 한구석이 켕기었다. 밥을 먹고 살 만큼은 되었으나 가슴 속을 허전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릴 때 하던 쪽물 들이기를 새로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조상에게 죄를 지은 듯한 그낌도 들었따.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쪽물 들이기 가업이 자식의 대에 와서 끊어졌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자기를 밥만 배불리 먹으며 살고 싶어하는 못난 후손이라고 욕할 것 같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생각은 더해 갔다. 조상을 볼 낯이 없다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내가 쪽물 들이기의 대를 끊어선 안 된다. 그러면 우리 것이 또 하나 사라진다. 새로 시작해 보자.'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윤 할아버지는 80년대초에 아들들에게 농사를 맡기고 쪽물 들이기를 되살려 부기로 마음먹었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의견에 따랐다. 윤 할아버지는 염색 과정이나 염색법 등은 어릴 때 해 본 일이라서 기억이 남아 있으나, 염색 원료인 쪽이 없었다. 쪽의 씨앗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마디풀과에 속하는 쪽은 한해살이 풀로 4월에 씨를 뿌리고 줄기 높이가 70~80cm 쯤 된다. 8개월쯤 베어 내는데 잎이 천연의 푸른 빛을 띠고 있어 우리조상들은 물감으로 많이 썼다. 윤 할아버지는 전국 여러 곳의 농과 대학을 비롯해 농촌 진흥원 등에 쪽씨가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번번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 실망했다. 그러던 84년 가을, 서울 인사동에서 매듭 연구실을 운영한다는 조일순(55살) 씨를 만났다. "여기가 윤병운 선생님 댁입니까?" "예, 제가 윤병운입니다만..." "쪽물 염색을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그렇긴 하지만 쪽씨가 없어서 그걸 구하고 잇는 중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무얼 하시는 분입니까?" 윤 할아버지는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이어서 몹시 궁금했다. "저는 매듭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통 염색법을 연구하려고 전라남도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선생님이 염색 전문가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조씨를 만난 것이 윤 할아버지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윤 할아버지로부터 쪽 씨앗을 구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은 조씨는 서울에 돌아가 전통 공예 보존 협회에 부탁, 일본의 교포를 통해 쪽씨를 얻어 보내 주었다. 쪽씨는 차 한 숟가락 정도의 적은 분량이었다. 윤 할아버지는 이듬해 봄 쪽씨를 집 앞 빈터에 공들여 심은 뒤 여름 내내 쪽 가꾸기에 매달렸다. 쪽은 탈없이 잘 자랐다. 가을에 쪽씨를 거두었다. 참으로 어렵게 얻은 씨앗이었다. 쪽씨를 거둔 다음 쪽물을 내 염색을 해 봤으나 쪽빛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윤 할아버지는 자기의 기억이 정확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 할아버지는 마을 노인들을 찾아다녔다. 틀린 것을 알아 내자는 생각에서였다. 틀린 곳이 많았다. 다음 해에 쪽씨를 받은 다음 또 쪽물을 들였다. 지난 해보다는 훨씬 나았다. 윤 할아버지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곧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도 곁에서 힘꼇 거들어 주었다. 윤 할아버지에게 할머니의 도움은 큰 힘이 되었다. 87년, 윤 할아버지의 뜻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이슬이 마르기 전에 쪽을 심어 놓은 밭에 나갔다. 낫으로 싱싱한 쪽을 베었다. 웬지 마음이 설레었다. 벤 쪽을 바로 큰 항아리에 넣었다. 그리고 물을 채웠다. 하루를 꼬박 불린 다음 물감을 우려냈다. 희뿌옇게 우러난 색소에 숯을 굽듯이 구워 만든 굴ㄲ질 가루를 섞었다. 30분 넘게 젓자 거품이 일면서 푸른 빛깔이 나타나더니 곧 검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윗물을 따라 냈다. 밑에 두부처럼 보송보송한 새까만 염로가 남았다. 이것을 그늘에서 말렸다. 잿물에 쪽 덩어리를 풀고 옷감을 넣었다. 일 주일쯤 놓아 두었더니 검은 빛깔이 자취를 감추고 깨끗한 쪽빛이 모습을 나타냈다. "여보, 이 쪽물 든 것 좀 봐요." 윤 할아버지가 옷감을 들고 아내에게 보여 주었다. "물이 잘 들었네요. 색깔도 아주 곱고요." 할머니도 무척 기뻐했다. "자, 이제 이 옷감을 말려야지." 윤 할아버지는 옷감을 5~6차례쯤 적셔 말렸다. 옷감은 새파란 바닷물 빛깔처럼 곱게 물들었다. 마침내 윤 할아버지는 잊혀진 쪽물 염색법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윤 할아버지는 해마다 밭 100평에 쪽을 길러 친지와 친척을 비롯해 염색을 주문해 오는 사람들에게 쪽물을 들여 주고 있다. 이 때까지 윤 할아버지 주위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했다. "농사나 지을 것이지, 이제 와서 물감 들이는 걸 배우겠다고 야단법석이니..." "누가 아니래. 그게 요새 뭐 필요하다고 난리를 피우는지." 윤 할아버지는 거기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쪽물 염색 방법을 알아 냈다고 알려지자 해마다 100여 명 이상이 찾아와 쪽물을 들여 갔다. 결혼할 때 쓸 혼수감을 들고 오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쪽물은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들여 주어도 이익이 남는 것은 별로 없다. 다만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업을 잇고 그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자는 뜻에서 윤 할아버지는 쉬지 않고 쪽물을 들이는 것이다. 쪽물을 들인 옷감이나 이불감은 특유의 향긋한 풀내음이 난다. 또 좀이나 해충 등이 슬지 않는데다 각종 피부병에도 효과가 뛰어나 엣날 양반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요즘에도 뒤늦게 쪽물을 들인 옷감이 몸에 좋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윤 할아버지를 찾는다. 나주군은 쪽물 염색 방법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윤 할아버지를 지방 인간 문화재로 지정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 기술을 이어받을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그것을 배워 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다. 그러나 윤 할아버지와 아내인 나정임 할머니는 실망하지 않고 쪽물 들이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열심히 정성 들여 일하다 보면 틀림없이 누군가 쪽물 염색법을 배우겠다고 나설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ff 24. 평생을 종이와 더불어 "홍관하 씨 종이가 참 잘 만들어졌어요." "그래요. 종이 두께, 질, 결이 모두 좋아요." "역시 오랜 경험이 쌓이고 봐야 돼요." 우리 나라 전통 한지인 창호지를 쭉 살펴보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지난 82년에 국립 현대 미술관이 전통 한지 제고 기술 공개회를 열어 여기에서 만들어진 창호지를 전시했다. 관람객들은 홍관하(83살) 할아버지가 만든 창호지를 보고 감탄했다. 홍 할아버지가 한옥 문에 바르는 종이인 창호지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3살 때부터이다. 지금까지도 이 창호지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 경력이 70년에 이른다. 평생을 종이와 함께 살아 온 셈이다. 70년 전을 돌이켜보는 홍 할아버지는 아득하기만 하다. 홍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북녘 땅인 황해도 수안군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다. 13살이 되던 해였다. "관하야, 너도 한학을 그만큼 익혔으니 일을 배워야겠구나." 아버지가 홍 소년에게 말했다. "배울 일거리가 뭔데요?" 그 때만 해도 아버지의 말을 거스르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큰아버지 종이 공장에 가서 일을 배워라." 홍 소년의 큰아버지는 손으로 종이를 만드는 조그만 공장을 집 안에 차려 일을 하고 있었다. "종이일 말이죠?" "그래,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니 배우거라." 홍 소년의 아버지는 종잇일이 크게 어렵지 않다고 말했으나 실지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종잇일은 손재주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손재주가 없으면 10년을 익혀도 제대로 종이를 뜨지 못한다. 반면에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1년을 떠도 잘 해낸다. 큰아버지 종이 공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홍 소년은 남다른 손재주가 있어 1년 만에 종이 뜨는 기술을 거뜬히 익혔다. 홍 소년의 큰아버지도 혀를 내둘렀다. 창호지의 원료는 닥나무인데, 그 껍질을 벗겨 종이를 뜬다. 홍 소년은 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일에서부터 시작, 10단계나 되는 창호지 만드는 과정을 혼자서 척척 해냈다. 창호지 제작 과정 10단계는 복잡하고 까다롭다. 맨 처음이 닥나무 껍질의 겉껍질을 벗겨 속의 하얀 껍질만 남긴다. 그 다음 잿물에 넣어 씻어 낸다. 그리고 색깔이 하얗게 되도록 표백 처리를 한다. 그 때 생긴 부스러기를 없앤 다음 염색을 하여 다시 씻어 내는 것이 앞단계 7가지 과정이다. 이어 원료에 닥풀을 먹여 종이를 뜬다. 납작하게 하기 위해 포개어 바위로 눌러 둔다. 그리고 15일쯤 말린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람의 손길이 100번이나 닿는다. 그래서 창호지를 백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년이 된 홍관하는 큰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홍 청년이 만든 창호지는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해, 황해도 일대는 물론 평안도, 만주,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특히 추운 곳인 데다 닥나무 생산이 안 되는 만주 지방에서 많이 팔렸다. 다다미 방(짚과 돗자리로 만든 두꺼운 깔개를 한 일본식 방)이 많은 일본으로 창호지가 많이 팔리는 것이 홍 청년에게는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있던 터라 우리 조상의 지혜로움을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지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수한 구멍이 나 있어 방안의 습도와 온도를 한지 스스로 조절해 방바닥의 습기를 걷히게 하고 썩는 것을 막는다. 이 때문에 창호지로 문을 바르고 한지 장판을 깔아 살아왔던 우리 조상들은 거의 감기를 모르고 지냈는지도 모른다. 홍 청년은 일본에게 우리 조상의 이런 슬기로움을 한지를 통해 알게 모르게 자랑한다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결혼을 한 홍 청년은 종잇일로 집안을 꾸려 갔다. "홍관하 씨가 신들렸대요." "무슨 신이 들렸답니까? 그럼 무당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무당은 무슨 무당. 종이 만드는 신이 들렸다는 구먼."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네." 홍 아저씨는 창호지를 하도 잘 만들어 황해도 일대에 이런 이야기가 퍼졌다. 그러던 중 6.25가 전쟁이 일어났다. 홍 아저씨는 곧 돌아올 수 있으리라 믿고 부인과 2남 1녀의 자녀를 고향에 남겨 둔 채 남으로 내려왔다. 막상 남쪽에 내려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종이 만드는 일뿐이었다. 창호지 만드는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이 나오는 곳을 찾아갔다. 그런 데는 틀림없이 종이 만드는 일거리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홍 아저씨의 생각이 들어맞았다. 그래서 단양, 제천, 영월, 문경 등을 돌면서 종이를 만들었다. 수원과 양주에서는 종이 공장에 들어가 일했다.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어 1962년에 마침내 강원도 원성에 조그만 공장을 차릴 수 있었다. 종이 공장을 차린 지 얼마 안 되어 소문이 났다. "홍관하 씨 공장에서 나온 창호지가 제일이야. 얇으면서도 질기고 깨끗해서 그 종이로 문을 바르면 방 안이 온통 환하지." 홍 아저씨는 종이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다른 사람 종이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종이는 불티나게 팔렸다. 서울에서는 하루에 14만 장이나 팔린 적도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서울에 한옥이 많아 창호지가 많이 쓰였다. 어느 날 이웃 사람이 창호지 한 장을 들고 쫓아왔다. "여기 찍힌 도장 좀 보세요. 도장이 약간 다른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없지요." "이걸 누가 서울서 가져왔는데 내가 보기엔 도장이 달라요." 그제야 홍 아저씨는 창호지에 자신의 도장처럼 찍힌 도장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틀림없는 가짜였다. "제 도장이 아닌데요." "그렇지요?" "예, 허허 그것 참." 홍 아저씨의 창호지가 워낙 유명하니까 도장을 가짜로 새겨 종이에 찍어 판 것이었다. 그렇게 많이 팔리던 종이도 10년을 가지 못했다. 경제 개발이다 새마을 사업이다 하면서 한옥과 초가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양옥과 아파트가 많이 생겨나면서 모든 문이 유리창으로 바뀌어갔다. 따라서 창호지도 팔리지 않는 물건이 되어갔다. "이거 큰일인걸. 밥도 굶게 생겼네." 회갑도 지나 이제 할아버지가 된 홍관하 씨는 이제 일거리가 줄어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종이는 꾸준히 만들었다. 안 팔린다고 놀고 지낼 수가 없었다. 종이는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가 났다. "그만 공장 문을 닫고, 다른 일을 하시지요. 자꾸 손해만 나는데 종이를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이웃 사람이나 친척들도 종이를 그만 만들도록 권했다. 홍 할아버지도 처음엔 버티었으나, 날이 갈수록 몸도 약해져 공장 문을 닫기로 마음먹었다. 1979년은 홍 할아버지에게 가장 가슴아픈 해가 되었다. 그처럼 온 힘을 쏟아 일하던 공장 문을 닫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도 오지 않고 마음이 아팠다. 공장 문을 닫지 않았다해도 나이가 많아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하는 종잇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젊은이에게 공장과 함께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해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홍 할아버지는 전통 한지 공장이 있는 원주로 이사했다. 평생 익힌 기술을 썩히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도 끊임없이 기술 지도를 하고 있다. @FF 25. 13대째 잇는 활 만들기 가업 "권오규 씨 아닙니까?"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나, 진식이야." "아, 진식이! 이게 얼마 만인가?" "그래, 자네도 몰라보게 달라졌어." "나도 누군가 했지. 너무 오래 못 만나서 그래. 못 알아 봐서 미안하네." "나도 마찬가질세." 두 사람은 반가워 맞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자, 우선 방으로 들어가세." 두 사람으 여간 가까운 친구가 아닌 모양이었다. 손을 잡은 채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 앉게. 누추하네만." "와, 이거 모두 활 아닌가? 참 멋진 방에 들어와 보네." "자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사를 갔으니, 헤어진 지 벌써 40년이 다 되어가네." "그렇군. 세월도 참 빠르지. 이렇게 늙어서 만날 줄은 몰랐네." "그러게 말일세. 자네 지금 어디 있나? 무얼 하고?" "인천에서 조그만 전자 가게를 하고 있어."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왔나?" "응, 대구에 갔다가 영주에 볼일이 있어 가는 참이야. 신문에 자네 얘기가 소개됐더군. 훌륭한 궁장으로 말이야.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동 245번지'라고 주소까지 자세히 났던데? 그래서 언제 한번 찾아보고 싶었어." "아, 그랬었군.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인데 그렇게 크게 실려서 쑥스럽네." "무슨 말을, 신문에 보니 자네가 13대째 활을 만들어 오고 있다던데. 그리고 그게 400여 년이라고 했더군. 이거 모두 자네가 만든 활인가?" "그래, 그건 그렇고 술이나 한 잔 하세." "그러지." 두 사람의 활 이야기는 이어졌다. 두 사람은 예천읍에서 함께 자라 같은 국민 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친구였다. "자네 아버님도 활 만드는 분으로 유명했지. 자네 어릴 땐 활을 만들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배웠길래 그렇게 잘 만드나?" 친구 진식 아저씨는 권 아저씨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17살 때야. 말도 마. 아버지 곁에서 새벽 1시면 일어나 활을 만들었어. 종아리를 맞아 가면서 배웠지." "왜 새벽에 만들었지?" "선조들이 물려준 귀중한 기술을 흐트러진 마음으로 배워선 안 된다는 뜻이었지. 요즘은 목욕을 하고 기도를 올린 다음 되도록 모두 잠든 밤중에 스님이 선을 하듯 바르게 작업을 하지. 그게 활 만드는 궁장의 기본 자세지." "하, 대단하군!" "궁장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무아경에 이르는 수양을 하지 않고는 절대로 훌륭한 활을 만들 수 없다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 "그래, 이젠 자네도 아버짐 경지에 들었겠군." "어림없어. 아버지가 만든 활만큼 마음에 드는 활을 만들어 보지 못했어." 권오규(53살) 씨의 아버지는 인간 문화재 47호였던 권영록 할아버지(86년에 세상을 떠났음)였다. 권 아저씨는 36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한국 활(국궁) 만들기를 배워 아버지가 남긴 명궁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늘 겸손했다. 권 아저씨도 지금 준인간 문화재로 지정받은 궁장이다. "자네 집안 활 만들기는 언제부터 시작됐나?"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400년 전 조선 숙종 임금때 권계황 할아버지(13대)가 활의 명산지인 개성에서 기술을 익혀 예천으로 내려와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더군." "정말 오래 되었네. 그동안 어른들 중에는 이름난 분들도 많았겠지?" "7대 권희직 할아버지가 임진 왜란 때 활 10만 개를 만들어 바쳐 왜군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더군. 그래서 교위용장이란 벼슬까지 얻었다더군." 권 아저씨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돈벌이도 되지 않았지만, 선조들의 솜씨를 되살리고 한국 활의 전통을 지켜 간다는 뜻에서 오늘날까지 활을 만들어 와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떳떳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가슴 뿌듯했다. 진식 아저씨도 훌륭한 친구를 두었다는 생각에선 마찬가지였다. "우리 만족은 옛날부터 활을 잘 쏘아 잦은 외침을 물리쳤지. 그게 다 자네처럼 활 만들기의 외길을 걸은 조상들 덕분이었지." "원 사람도, 나를 거기까지 올려놓다니..." "아니야. 세계적인 양궁 선수인 김진호도 우리 예천에서 나왔잖아. 그래서 예천은 한국 양궁의 중심지가 되었지." "내 고장의 문화는 고장 사람이 빛내야 된다는 뜻에선 나도 같은 생각이야." "아, 그런데 자네 아버님께 활을 배워 독립한 게 언젠가?" "활은 10년 이상을 배워야 혼자 만들 수 있게 되지. 그리고 또 10년이 지나야 자기 나름대로의 옳은 활을 만들 수 있어. 순전히 손으로만 만드니 그렇게 힘들지." "활 1개를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나?" "100일 이상 걸리지. 한꺼번에 여러 개의 활을 만들기 시작하지." "그렇게나 많이?" "그뿐인가. 1개 만드는 데 손이 4,000번 정도 가야 되네." "그러면 1년엔 몇 개나 만드나?" "100개 정도." "값은?" "10~20만 원." "그래 가지고 생활이 제대로 되나?" "어렵지. 더군다나 요즙은 양궁에 밀려 더 힘들지." "좀 많이 만들면 안 되나?" "그럴 수도 있지만, 집안의 명예와 권위도 지켜야지. 마구잡이로 만들었다가는 내가 조상에게 욕을 먹이는 것이지." 진식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활 만드는 법을 좀 얘기해 주게. 나야 잘 못 알아듣겠지만, 궁금하네. 이것도 활 만드는 연장인가?" 진식 아저씨는 조그만 톱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맞아. 톱과 망치, 밧줄, 대빗, 도가니, 대칼 등이 주로 쓰이지." "재료는 뭔가?" "담양 왕대, 지리산 산뽕나무, 태백산 굴참나무, 황소 등 힘줄, 물소 뿔, 벚나무 껍질 등일세." "재료가 구하기 힘든 게 많군?" "물소 뿔은 외국에서 사다 쓰지." 권 아저씨는 만들어 둔 활 중에서 하나를 들고 친구에게 만드는 순서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먼저 왕대를 불에 굽지. 왜냐하면 진을 빼야 하거든. 그다음에 물소 뿔을 톱으로 켜 대나무에 붙이고 소 힘줄을 풀로 발라 활 모양을 만들지. 가운데 줌통(활 한가운데의 손으로 쥐는 부분)은 참나무를 깎아 물에 삶은 뒤 다시 불에 구워 왼구비(쏜 화살이 높이 떠가는 모양)로 붙이고 활의 양쪽 끝에 산뽕나무를 이어 버들잎을 붙여 곡선의 멋을 내지." 권 아저씨는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모시날처럼 곱게 다듬은 황소 등 힘줄은 네 번에 나누어 활 안쪽에 붙이지." "왜 안쪽에 붙이나?" "그래야 활을 당겼다 놓으면 본래대로 돌아가면서 활을 튕겨 주지." "그래, 그 다음에는?" "활이 다 된 다음에는 모양을 내기 위해 바깥 쪽에 벚나무 껍질 등을 입혀 보기 좋게 꾸미지." "그것 참 복잡하고 어렵구만." "그것만 가지고 안 되지. 활시위를 당기는 힘이 가장 중요하지. 활 전체의 힘을 잘 모을 수 있어야 되네. 그래야 표적물에 맞은 화살이 중국 한나라 명장 유비의 활처럼 철판을 뚫고 나갈 수 있지." "자네가 만든 활 중에도 좋은 것이 많지?" "별로, 미국 부시 부통령(현재 미국 대통령)이 우리 나라를 방문했을 때 선물한 활과 영국 황실이 주문한 활을 만들었지." "대단하구먼. 이제 자넨 누구에게 활을 가르칠 셈인가?" "글쎄, 마땅한 사람이 없어 그게 고민이야. 좋은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네." "오늘 얘기 재미있게 들었네." 두 친구는 유쾌하게 웃었다. @FF 26. 부채와 함께 살아 온 세월 "기동아, 나하고 같이 안 갈래?" "어디?" "전주." "거기는 왜?" "볼일이 있어서 가는데 같이 가고 싶어서." 기동 청년은 친구가 전주에 같이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따라 나섰다. 전주에 도착하자 친구는 부채 만드는 가게인 전주 공예사를 찾아갔다. 거기서 볼일이 있었던 것이다. 가게 안에는 부채가 가득 걸려 있었고, 사방에 잔뜩 쌓여 있었다. 부채를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그렇게 많은 종류의 부채를 구경한 것은 처음이엇다. 눈이 휘둥그래졌다. 너무나 멋있어서 넋이 빠질 지경이엇다. 그 뒤로 기동 청년은 친구와 함께 그 곳을 몇 번 드나들게 되었다. 찾아갈 때마다 부채의 멋이 새롭게 느껴졌다. 부채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어떤 때는 꿈 속에서 자기가 만든 부채를 펼쳐 들고 부치다가 잠을 깨기도 했다. 그러기를 3년이 되었다. 기동 청년은 20살이 되면서 부채 만드는 것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가게 주인을 만났다. "주인 아저씨, 부채 만드는 걸 배우고 싶은데요?" "재미있고, 부채가 멋있게 보여서요." "그렇다면 배워 보게." 그러나 기동 청년의 부모는 부채 만드는 것을 반대했다. "너는 우리 집안의 대를 이어 갈 사람이다. 그런데다 3대 독자가 아니냐. 그런데 어찌 부채를 만들게 하겟느냐?" 아버지는 마구 화를 냈다. "부채 만드는 일이 어째서 나빠요?" 기동 청년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은 옛부터 상놈들이나 해 온 것이야.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부채 만들기를 배우려고 하느냐?" 기동 청년은 며칠이나 부모를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 냈다. 태어나서 자란 장성을 떠나 전주로 거처를 옮겼다. 부채 만드는 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전주 공예사에서 자고 먹으면서 부채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기동 청년은 부채 만들기의 세 과정을 익히는 데 4년이나 걸렸다. 첫과정은 초조로, 미끈한 대를 골라 잿물에 삶고 볕에 말려 3~4일 동안 물에 담그었다가 200도의 화덕에 쪄서 길이 27~42cm, 너비 1cm, 0.2mm 내외로 얇게 깎는 일이다. 그 다음은 중간 과정으로 정련을 한다. 천연 섬유에 얇은 대조각을 80개씩, 민어 뼈를 삶아 만든 풀로 붙여 하루쯤 말린 다음 손잡이에 쇠뼈를 붙이고 고리를 만드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살을 곱게 다듬은 뒤에 살과 변죽에 박쥐, 국화 등 문양을 새기고 광을 내 종이를 붙인다. 이것이 낙광 과정이다. "이제, 자네 부채 만드는 솜씨가 그만하면 더 배울 게 없네. 혼자서 더 잘 만들도록 힘쓰게." 가게 주인이 기동 청년을 불러 조용히 얘기했다. "아직 제 솜씨가 많이 서투른 것 같은데요." "겸손의 말일세. 지금부터가 더 힘들걸세. 열신히 만들면 꼭 훌륭한 장인이 되리라 믿네." 기동 청년은 아닌 게 아니라 지나간 4년이 무척 긴 듯했다.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참 어려웠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부채 하나 만드는 데 200번도 넘게 손이 갈 줄은 몰랐다. 대나무를 자르고, 깎고, 쪼개고, 광을 내고, 인두로 문양을 새기고, 종이를 붙이고 마무리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나무에 찔리고 칼에 베어 생긴 흉터가 여러 군데 생겼다. 그러나 두 손의 흉터를 들여다보는 기동 청년은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것은 열심히 부채 만들기를 배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기동 청년의 부모도 부채 만들기를 배우고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맞았다. "고생했다. 잘 배웠으니 다행이다." 아들의 절을 받은 아버지는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아버지, 저도 부채 가게를 차렸으면 하는데요?" "가게를? 어디다 차리려고 하니?" "전주에다 차려야겠지요." 아버지는 쉽게 허락했다. 한 달 동안 가게를 꾸미느라 기동 청년은 바쁘게 보냈다. 마침내 가게 간판이 내결렸다. '영진 공예' 기동 청년은 가슴이 부풀었다. 전주에서 제일 가는 부채 가게를 만들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축하해요." "젊은 청년이 기특도 하지." 이웃들이 함께 기뻐했다. 어른들은 기동 청년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이 때부터 기동 청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채를 만들었다. 부채 만들기뿐 아니라 부채의 내력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부채는 고려말과 조선 시대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가 되면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부채를 나눠 주고 신하들은 하사 받은 부채에 그림이나 시를 적어 웃어른이나 은혜를 입은 친지들에게 주던 것이 널리 퍼져 조선말까지 이 전통의 맥이 이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부채는 크게 쥘부채와 방구부채로 나눠지고, 쥘부채는 다시 단죽선과 합죽선으로 분류된다는 것도 익혔다. 쥘부채는 접었다 폈다 하는 것이며, 방구부채는 방형이나 둥근형을 묶어서 일컫는 이름임도 배웠다. 10여 년이 흘러 이기동 아저씨의 부채는 전주에서 손꼽히는 부채로 소문이 났다. 그 때문에 주문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손에서 시작해서 손으로 끝나는 부채는 5명이 온종일 매달려야 10~12개밖에 만들지 못한다. 부채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엇다. 이 아저씨는 부채 만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나일론 부채가 만들어지고 선풍기가 나오자 부채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부채 만들기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리어카 장사라도 해야 되겠구먼. 이래 가지고서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네." 이 아저씨는 부채 만들기를 그만둘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부채는 나의 또다른 분신(몸)이다. 나의 모습이다. 만약 부채를 만들지 않으면 나의 참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참자.'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차츰 국민 소득이 높아지면서 기계로 만든 부채에 싫증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다시 값이 좀 비싸지만 손으로 만든 부채를 찾게 되었다. 부채와 42년을 함께 할아 온 이기동 할아버지는 전주시 남고동 전통 공예품 협동 단지 안의 작업장에서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손으로 만든 부채를 다시 찾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보답하기 위해서다. 평생을 한 길에만 매달려 와 이젠 이 할아버지가 만드는 부채는 전주에서도 가장 뛰어난 명품으로 꼽히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지낸 시간보다 부채와 호흡하며 보낸 시간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라고 이기동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부채 만들기 기능 보유자가 되었으며, 곧 인간 문화재로 지정될 것이라고 한다. '합죽선 할아버지.' 합죽선 만들기라는 외길을 40여 년 동안 걸어서 얻은 명예로운 이름을 이 할아버지는 이제 두 아들에게 이어 주고 있다. 이미 두 아들에게 부채 만들기를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고 사위에게도 가르쳐, 사위는 '한진 공예'라는 작업장을 차려 독립해 나갔다. 부채 만들기의 맥은 이렇게 이 할아버지로 부터 오늘도 뻗어 나가고 있다.